언론공백기 깨고 독자에게 다가간 인천일보
▲지역지 위상 높인 경기매일신문
당시의 유력지인 인천신보는 1959년 7월 사세 확장을 목적으로 제호를 '기호신문(畿湖新聞)'으로 바꾸고, 보급망을 충청도까지 넓히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경영진들은 1년 만에 제호를 다시 '경기매일신문(京畿每日新聞)'이라 고쳐 재차 경기도 내에서의 일등 신문을 지향했는데, 1973년 소위 '통폐합'이 있기 전까지 사실상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본보는 지방지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한 지방지이지만, 이 정권의 미움을 받기로는 이름 있는 중앙지에 못지 않았다.(중략) 이승만 박사의 사진을 톱으로 모시지 않았다 하여 폐간 운운으로 박해를....(중략) 3ㆍ15 부정선거가 임박할 무렵인 2월 7일 '욕된 영예를 노리지 말고 부정선거 철저히 막자'는 사설이 말썽이 되어 치명적인 위협을 당한 적도 있다.(중략) 본보는 사설과 기사를 마산 사건의 것으로 전 지면을 채웠다. 경기매일신문은 이 전통, 이 정신을 그대로 이어나갈 것이다." 앞서 인용한 1960년 7월 7일자 1면 컬럼에서처럼 경기매일의 올곧은 논조는 자타가 인정하였고, 사세도 나날이 나아져 1971년 4월에는 지역지로서는 처음으로 7층 규모의 사옥을 신축하였으며, 일본에서 최신형 윤전기를 도입해 지면 쇄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언론을 죽인 1도1사(1道1社) 정책
그러나 인천 언론은 뜻하지 않은 암흑기를 맞았다. 군사 정부에 의해 소위 1도1사(1道1社) 정책이 강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1도1사(1道1社) 정책'과 문구 하나 다르지 않은 폭거였다. 그에 따라 '주간인천'을 승계한 '연합신문'과 경기일보, 경기매일신문 3사는 강압에 의해 1973년 7월 30일 울며 겨자 먹기로 소위 '경기3사 통폐합추진위원회'를 열고, "유신 시대에 대처할 강력한 지역 신문의 필요를 재확인하고 8월 31일자를 끝으로 자진 폐간한다"는 본의 아닌 '강제된 성명'을 냈다. 이 말도 안 되는 정치적 놀음에 당시 지역 언론인들이 뚜렷한 입장을 천명해 본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인천 언론사의 뼈아픈 장면으로 남아 있다. 특히 오랜 연륜과 신식 시설을 갖춘 경기매일신문을 후발 '연합신문(사장 홍대건)'에 흡수시켰다는 것은 누가 봐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로써 인천은 신문사가 없는 언론 공백기를 맞았고, 더불어 지역 언론인들의 이합집산이 있었다. 상당수 인원이 수원 본사 혹은 인천지사 등에 근무하였으나 3사 통합에 반발한 일부 인사들은 언론계를 떠나거나 인천상공회의소(회장 채호)가 발행하는 '인천상의보(仁川商議報)'로 적을 옮겨 언론의 공백을 나름대로 보완해 가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 유신 시대가 끝나기까지 "유신시대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오늘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유신 과업의 최고봉에 설 것을 다짐한다."는 경기신문(京畿新聞)은 1977년 인천분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7월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하자 인천, 경기 지역을 모두 수용한다는 취지 아래 이듬해 3월 1일 제호를 '경인일보(京仁日報)'로 바꾸었다.

1.1988년 인천일보(당시 인천신문) 창간호를 내고 사옥 앞에서 임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마침내 탄생한 인천일보(仁川日報)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자 가장 먼저 대두된 사회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언론의 공백이었다. 인구 100만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 본사를 둔 신문사 한 곳이 없다는 것은 세계 언론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었다.
더구나 1개 지방지만으로 지역 언론의 올바른 형성과 전달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다. 특히 신문사 하나 없는 인천의 실정은 더욱 열악하기만 했다. 그 같은 언론 부재 현상이 타개된 것은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6ㆍ29선언'에 의한 것이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의 자유 보장이었다. 언론의 자유화, 자율화가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인천상공회의소 회원사들 사이에서도 신문사 설립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경인일보(京仁日報) 주주였던 15명의 인천 주주들은 1988년 4월 25일 '주식회사 인천신문(후에 인천일보로 개제)의 등록 인가를 받고, 같은 해 7월 15일 마침내 창간(創刊)함으로써 기나긴 언론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대중일보의 맥을 이은 정통 지방지의 탄생이라는 새 역사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천신문(仁川新聞)'은 초대 대표이사에 문병하(文炳河) 한염해운(주) 사장을 선임하고, 옛 경인일보 인천분실 사옥을 이어 사용했다. 윤전기는 일본 스미모토 사의 고속 컬러기로 마련하고 매일 12면, 석간으로 발행했다. 1990년 7월 창간 2주년 때부터 제호를 오늘날과 같은 '인천일보(仁川日報)'로 변경하고, 1992년 3월 2일부터는 매일 16면을 발행하면서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신문을 만들기에는 여러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사옥은 일제 강점기 때 인천곡물협회로 사용했던 2층 건물로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틈새가 벌어진 천장에서는 비둘기가 울어대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꺽 소리가 요란하였다. 에어컨이 있을 리 없었다. 창간의 열띤 분위기와 맹하(孟夏)의 열기가 보태져 편집국은 가히 열탕이었다. 기사를 쓰면서 이마의 땀을 연실 닦아내야 했었다. 그 무렵, 함지박보다 더 큰 프라스틱 대야를 구하고 거기에 대형 얼음을 담아 여기저기 놓고 삼복더위를 났던 것이 편집국의 풍경이었다.

▲주조기(鑄造機)에서 사식(寫植) 시대로
인천일보의 창간은 신문 제작면에서도 매우 독특한 과도기였다. 서울 지역 신문들이 전산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던 때에 인천일보는 60년대 연활자 방식을 고수하면서 출발했던 것이다. 주조실에서는 납을 끓여 활자를 한 자, 한 자를 만들어냈고, 문선실에서는 글자 수대로 활자를 뽑아내 조판(組版)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수공업적 제작 형태는 곧 CTS 시스템으로 전환되었고, 몇 년 후 수십억 원을 들여 윤전기도 최신식 초고속 컬러기로 바꾸었다. 사옥도 현대식으로 바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듯 처음 출발은 미미했지만 단시간 내 사옥과 제작 공정을 혁신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은 경영진의 과감한 투자와 일선 기자들의 '좋은 신문을 만들겠다'는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계속>

/글·사진제공=조우성 전 인천일보 편집부국장·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