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언론사를 되돌아본다
▲개화 문물의 총아였던 신문

개항은 인천의 근현대 문화사를 말할 때 그 시발점이 된다. 저 공맹(孔孟)과 백가(百家)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근대 자본주의의 변방에 편입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도성에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양선의 내습을 감내하였고, 그 후 개화 문물의 세례(?)를 받았던 것 또한 역사의 한 과정이었다. 인천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변천하게 된 것은 타 지역과는 달리 상고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핏줄에 면면한 맥에 대고 있었다기보다는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서구 문물의 소용돌이 속에 형성되어 온 측면이 오히려 컸던 것이었다.
신구 문화의 충돌, 그에서 빚어지게 된 또 하나의 신문화- 그것이 인천 근현대 문화의 한 축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개항 전, 인천의 건축물이래야 가장 규모가 큰 것이 관교리의 인천도호부였고, 인천의 종합 인문 지리지라 할 '인천읍지(仁川邑誌)가 고작 기십 쪽에 불과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신문(新聞) 역시 이 땅에는 '없던 신문화'였다. 백성에게 고지할 것이 있으면 저잣거리에 '방(榜)'을 내다붙이면 그만이었던 시절에 나라 안팎의 정보를 백성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정 자체가 나라밖 사정에 어두웠던 나머지 병인ㆍ신미 양요(洋擾) 뒤 전국 각처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를 물리쳤다고 기세를 올렸던 판이었으니 '신문 발행'은 사회 전 분야에 일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상당 부분이 그렇듯 그것 역시 일본이라는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투사되었다. 그 효시는 서울이 아니라 항구 도시 부산에서였다. 1881년 12월 10일 발행된 순간(旬刊) '조선신보'가 그것인데, 조선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보다 1년 2개월이 앞선 것이었다.

▲인천서 발행된 일인 신문들
인천에서는 1890년 1월 28일 일본인들이 '인천경성격주상보(월 2회)'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1891년 조선순보(월 3회), 1892년 조선신보(주간), 1908년 조선신문(격일간에서 일간)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해 오다가 1919년 12월 18일 서울로 본사를 옮겨 1941년 2월까지 발행하였다. 제물포해전 직후인 1904년 3월에는 인천서 국한문 혼용 한국어 신문인 '대한일보'가 일본인 하기야 카즈오(萩谷籌夫)에 의해 발행되었는데, 그 역시 그해 12월 본사를 서울로 옮겨 갔는데, 비록 한국어로 제작되었다고는 하나 일본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1894년의 신조선(1895년 폐간), 1906년의 조선일일신문(1908년 서울 이전), 1907년의 '조선타임즈(1908년 조선신보와 합병), 1921년의 조선매일신문(폐간 연도 미상) 같은 신문들의 부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니 일본인들의 신문이었을 뿐이었다. 1896년 4월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된 최초의 민간 국문신문인 독립신문은 그 같은 일본인이 휘어잡던 인천 언론의 공백을 메우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독립신문은 창간 이후 인천 화평리에 사는 전경택의 '애국가' 게재, 인천항 상봉루 기생 9명의 독립협회 보조금 90전 기부, 세창양행의 금계랍 , 홈링거상회의 사탕과 밀가루 판매 광고, 인천항 화평국 약방의 감기약 발명, 경인선 철도 개통식 보도 등 인천의 소식을 지속적으로 실어 동아, 조선, 시대일보 등이 창간돼 지국을 설치하기 전까지 인천 지역의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인천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신문을 만들어 나누어 보기 위해서는 광복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

▲국문신문 '대중일보(大衆日報)'의 탄생
1945년 10월 8일, 마침내 우리 손으로 만든 인천 최초의 국문 신문인 대중일보가 탄생되었다. 이 신문은 개항 후 기나긴 언론 부재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진정한 의미에서 인천 언론사의 첫 장을 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와 함께 오늘 창간 20주년을 맞은 인천일보(仁川日報)는 대중일보(大衆日報)의 후신인 인천신보(仁川新報), 기호일보(畿湖日報), 경기매일신문(京畿每日新聞)의 맥을 계승한 인천 언론의 정통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대중일보 제1호는 타블로이드 판 1면(정가 20전)만을 인쇄한 것이었지만, 각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창간 취지는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적시한 내용으로 "혼돈 속에 빠져 있는 민중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엄정 공평한 보도를 통해 건국대업(建國大業)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당당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중일보 역시 좌우익의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같은 사회적 양상은 그대로 지면에 반영되면서 지령(紙齡)을 더해 나갔는데 1945년 10월 19일자의 '민족 반역자를 소탕하라'는 사설은 좌우익 모두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중일보는 그로부터 5년여 동안 지역 사회를 선도하면서 맹활약을 했으나 1950년 6ㆍ25전쟁 발발하자 지령 제1488호로 휴간치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3월 1일 창간해 쌍벽을 이루던 좌익 성향의 구 인천신문(사장 김홍직) 등도 발행을 중단했다.

▲전시에 발행된 인천신보(仁川新報)
6ㆍ25전쟁 중에도 인천의 언론은 그 맥을 이어 나갔다. 전쟁 발발로 인천을 떠나야 했던 대중일보 관계자들은 9ㆍ15 수복 후 인천으로 돌아와 제호(題號)를 '인천신보'로 바꾸어 신문 발행을 계속하였다. 전쟁 중임에도 경기도 내에서 발행한 유일한 지역지로 판형을 오늘날과 같은 표준 신문판형 2면으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인천신보는 휴전 때까지 전황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고, 전후에는 혼탁해진 사회상을 고발하면서 그 상흔을 치유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전시판 '대한일보'가 인천에서 발행되었고, 후에 경인일보(京仁日報)로 개제한 '구(舊) 인천일보', 시 기관지 '인천공보', 민간 주간지 '주간인천' 등이 발행되었다.
그 후 우후준순처럼 주간지들이 생겨나 1961년 1월 현재 인천시 공보계에 등록된 언론 기관은 156개소, 기자는 600여 명을 헤아리는 등 난립상을 보여 사회 문제로까지 부각되었다. 경기평론신문, 경기비판신문, 경기문화신문, 경기경제, 경기신보, 경기산업신문 경기민경, 인천통신, 동서통신 등은 그 무렵 인천에서 발행된 주간지, 일간지, 통신사 들이었고, 그 외 지사, 지국 등을 설치한 서울 지역의 신문, 통신사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