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장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던 환쟁이를 신기하게 구경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넓적한 붓에 여러가지 색깔의 물감을 찍어 능란하게 꽃나무도 그리고 새도 그렸다. 한참이나 구경하던 할아버지들께서 더러 그림을 사기도 하고 원하는 내용을 주문하시기도 했다. 그림에 곁들인 글자는 유교의 삼강오륜을 나타내는 충 효 예 의 따위의 한자로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효(孝)자에는 잉어나 죽순이 그려졌는데 그것은 중국의 효자 왕상과 맹종의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얼음속의 잉어와 눈속의 죽순을 구해 늙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내용인데 효자들에게는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는 옛 이야기를 촌로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부부의를 나타내는 원앙이나 꿩 그림이 있고 아들 낳기를 원하는 연꽃과 잉어 그림도 있었는데 아낙들이 주로 사갔다.

 이런 그림이 민화의 일종이다. 우리의 얼굴이라 할 민화는 수준있는 작품이 아니라 생활공간의 장식용이면서 소원의 뜻이 담겼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웃음과 해학이 함축되어 우리의 감정과 애정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대개 병풍이나 족자가 아니면 다락문의 장식용으로 그려졌다. 현관이나 방문에는 수호신인 호랑이 청룡이 대청엔 윤리문자 아낙들의 규방인 안방에는 부귀다남이나 부부금실을 상징하는 그림이 걸렸고 남자들의 사랑엔 학문을 뜻하는 책이나 문방사우를 소재로 했다.

 민화라는 말이 우리사회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초였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일본인이다. 우리 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지녔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나요시가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를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 미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했다. 60년대가 되어서야 전통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싹트면서 우리 얼이 담긴 민족화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최근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활발하고 수집가들에 애호되자 한때 도둑들이 눈독 들이기도 했었다.

 인천전통민화협회 창립전이 지난주 종합문예회관에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