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미국 영화 중의 하나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이다. 속편까지 소개된 이 영화는 발전된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박진감있는 화면 처리로 영화팬들을 사로잡으며 제작사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 스토리는 단순하다.

 미래에 있을 법한 기계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 그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주권 회복 전쟁. 그리고 싸움이 격렬해지자 기계 인간들이 대항 세력인 인간 집단 지도자의 출생을 막기 위해 보낸 터미네이터와 이를 저지하려는 인간 간에 벌이는 사투(死鬪)가 이야기의 전부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스토리 전개 속에서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던지고 있다. 「미래 사회의 영속적인 지배를 위해 만일 대항 세력 지도자의 출생을 막을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적 역사 접근에 대해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통용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지도자의 출생을 보호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파견된 인간이 결국 역사적 사실(지도자의 출생)을 낳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은 인위적인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강한 주장을 담고 있다.

 가정은 문학의 영역일 뿐 역사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역사학계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불용론에도 불구하고 현실 사회에서 사실에 대한 가정법적 음미 행위는 그치질 않고 있다. 사실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미국 역사학계에서조차 가정법적 역사해석인 if학설이 한때 풍미했을 정도였으니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만일」이라는 가정 설정과 이를 전제로 한 상상이 난무하는 것은 어느 측면에선 당연지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반인들의 가정법적 상상이, 발생된 일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불만의 소리를 담고 있을 때일 게다.

 IMF 체제 2년.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찾아 온 불청객인 까닭에 갖은 고통과 인내를 감수해야만 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기간 지역 사회에는 수많은 불만의 if학설이 나돌았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경기은행과 대우그룹의 붕괴, 한진그룹 세무조사.」 지역 연고 기업과 관련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삼삼오오 모이면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일쑤이다. 『만일 경기은행이 부산이나 광주에 있었다면 퇴출됐을까. 대우자동차가 광주에 있었다면 현재와 같은 신세가 됐을까. 한진그룹이 정치적인 실권을 잡고 있는 다른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었다면 이런 지경에 처했을까.』

 경제 분야에 있어 현 정부의 통치 철학인 DJ노믹스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도입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 구조의 투명성과 형평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으로 오랫동안 기득권자간의 유착과 왜곡 속에서 살아 온 국민들에게 신선함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실행 과정은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곳곳에서 종래의 관치(官治)와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삼성자동차가 부산지역 정치권과 시민들의 반발 이후 재가동에 들어가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가계(家系)의 부당 상속이 흐지부지 처리되고 있는 현실. 이런 가운데 굳이 인천 연고 기업들만이 연속적으로 단죄되는 모습을 보면서 시민들 사이에 if학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을 그저 유언비어의 양산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경기은행 해직자 협의회가 강제 퇴출로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서명운동에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경은 이해당사자들의 정부를 향한 볼멘소리는 퇴출된 지 1년5개월여가 됐건만 전혀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IMF 체제 2년을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지역사회에 왜 불만의 if학설이 확산되고 있는지 위정자들은 곰곰이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