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년 역사를 가진 한국 천주교가 2000년 대희년(大禧年)을 앞두고 역사적 과오를 민족 앞에 참회하고 반성하는 토론회를 가져 주목을 끌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소장^김종수)가 최근 개최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은 ▲18세기 말 서양선박 요청사건 ▲제사금지에 따른 갈등 ▲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 무시 ▲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 태도 ▲신사참배 허용 등을 교회가 저지른 대표적인 잘못으로 꼽았다.

 이날 참석자들은 『천주교 전래기에 교회와 사회가 충돌했던 것은 대부분 교회가 당시의 민족사적 요구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한 채 맹목적인 신앙의 논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원주교구 교회사연구소의 여진천 신부는 『1796년과 1801년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서양 선박과 병력을 요청하는 서한을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낸 것은 서양 배와 군대가 오면 천주교에 대한 금령(禁令)이 풀려 선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풀이하면서도 『이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반민족적인 중대한 협박이었다』고 평가했다.

 인천가톨릭대의 최기복 교수는 『18세기 교황청의 정복주의적 선교정책에 따른 제사금지 조처는 천주교를 패륜의 사교(邪敎)로 낙인찍히게 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 아니라 선교지 문화와의 교섭을 통한 복음의 토착화를 더디게 하는 장애로 작용했다』며 교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가톨릭대 장동하 교수도 『개항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민족 고유의 문화와 풍습 등을 야만시함에 따라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 물론 지식인들의 반외세감정을 부추겼으며 1899년 강경포 교안(敎案)과 1901년 이재수의 난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전남대 윤선자 교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천주교회가 민족운동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태도를 문제삼았고, 한신대 강인철 교수도 『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한 것은 반민족적^반가톨릭적인 과오였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