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민족의 십자로 코카서스
2007년 8월 06일 (월, 제16일)

BC 7세기경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보이는 우플리스 테시케 동굴사원.
아침기온은 18℃로 좋은 날씨다. 오늘은 트빌리시로 되돌아가는 길에 스탈린의 고향, '고리', 아테니시오니 교회, 우플리스테시케 동굴사원에 들리려고 한다.

오전 11시 30분, 고리(Gori)에 도착했다. '고리'는 트빌리시의 북서쪽 76㎞에 있는 작은 마을로 구 소련의 스탈린(1879~1953)이 태어난 곳이다.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 제2대 최고지도자(재임기간 1922~1953)로서 우리민족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의 박물관을 찾아왔다. 박물관의 중간쯤에 스탈린의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우크라이나 동부 '키로프'지구 전투에서 자국병력 50만 명과 같이 독일 남부집단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사령관 F. 파울루스 장군)은 소련군에게 포위되었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포위망을 좁혀 시내에 돌입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허가 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원수로 승진시켜 격려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1월 31일, 항복하여 24명의 장군과 2500명의 장교를 포함한 9만 1000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히틀러는 F. 파울루스 장군과 '야콥 주가시빌리'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거절했다.
 
게르게티산 정상에 서니 뒤로 카즈베크산이 구름을 이고있었다. 우리일행은 지프차 6대에 나누어 타고 험한 산길을 올랐다

7세기 초반에 건립된 아테니시오니 교회. 내부에는 오래된 프레스코화가 소장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스탈린에게 보내온 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꽤 많은 나라에서 보낸 것으로 보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그 중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중국에서 보내온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고 수놓은 3개의 긴 족자(簇子)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오래 살지는 못하고 74세에 죽었다. 스탈린이 죽은 후 베리아(Beria, 소련 비밀경찰, 1899~1953)가 스탈린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리 시청의 스탈린 동상. 그루지야는 스탈린의 고향이기도 하다.
제2전시실입구 마룻바닥에 스탈린이 죽고 4시간 후에 뜬 검은 '데드 마스크'(death mask)가 놓여있다. 왜 진열대에 올려놓지 않고 바닥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 밖에 나오니 스탈린의 생가가 복원 중에 있었다. 셋방의 방 두 칸이다. 생가 옆에 스탈린의 전용열차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검소했다. '고리'를 떠나면서 '고리' 시청 앞을 지나갔다. 시청마당에는 스탈린의 대형동상이 서있다. '고리'를 떠나고 2시간 20분 후 아테니시오니 교회에 들렸다. 이 교회는 7세기 초반에 세워진 교회로 '고리'에서 약 8Km정도 떨어진 아테니 협곡에 있었다. 즈바리 교회와 같은 건축양식이며 내부에는 많은 오래된 프레스코화가 있다. 30분 거리에 있는 우플리스테시케 동굴사원에 들렸다. 이곳에는 강가의 산 경사면에 무수한 동굴이 있다. BC 7세기경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강변에도 여기저기 흩어진 많은 유적이 내려다보인다. 오후 5시 30분(34℃)이 되어서야 서둘러 동굴사원을 떠나고, 오후 10시에 겨우 트빌리시의 호텔에 도착했다.
 

여행 수첩


스탈린은 구두제작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비밀결사조직에 가담하면서 그리스도 정교회 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22살에 직업혁명가가 되어 카프카스(코카서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스탈린이란 본명이 아니고 필명(筆名)이며 [강철의 사나이]이라는 뜻이다. 스탈린은 20세기에 그 이름을 날린 독재자의 한 사람으로 공산당 안의 반대파 및 반혁명분자에 대하여서는 숙청이라는 미명아래 2000만 명이란 사람들을 학살하고 과혹한 억압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