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7월24일 (토)

늘은 라호르를 떠나 라왈핀디로 가는 날이다. 라호르에서 라왈핀디까지는 270㎞이며 450년전 무굴 왕조시대에 건설된 그랜드 트렁크 로드(Grand Trunk Road)위에 있으나, 우리들은 우리 나라 대우가 건설한 대우 모터웨이(Motor Way M2)를 달려 7시간 만에 라왈핀디에 도착하였다. 파키스탄에서는 고속도로를 모터웨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모터웨이는 왕복 6차선에 최고속도 140㎞/Hr의 파키스탄이 자랑하는 고속도로이다. 그러나 오가는 차는 별로 없다. 어떤 때는 양측 차선의 앞뒤에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라비강을 건너고는 넓은 평야에 논이 끝없이 펼쳐진다. 가끔 붉은 벽돌의 낮은 농가들이 7∼10채 모여 있으며 물소들이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평화로운 농촌풍경이 펼쳐진다. 용수로가 정비되어 물이 풍부한 듯하다. 엔진이 달린 펌프로 지하수를 퍼올리는 것도 보이고 모심기를 하는 농민들도 보인다. 두 시간 만에 체납강을 건너고 곧이어 대우가 경영하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의 도로 표시판에도 DAEWOO라고 쓰여 있고 휴게소에는 대우가 경영하는 대우 고속버스도 한 대 서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대우그룹이 해체된다고 보도되고 있었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출발한지 4시간 반 만에 제럼강에 도달했다. 큰 강이다. 강을 건너고 20분 후에 고갯길이 시작되더니 17분후에는 해발 825m의 고개 위에 올라왔다. 길 양쪽의 지층들은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융기되어 올라 온 흔적들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오후 3시에 라왈핀디에 도착했다.

 라왈핀디는 수도가 카라치에서 이슬라마바드로 옮겨지기 전의 임시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온 도시이다. 라왈핀디는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20㎞ 떨어져 있으며, 35㎞ 서쪽에는 간다라 불교유적의 하나인 탁실라가 있다.

 잠시 쉬었다가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샤 파이살 모스크」(사원)에 갔다. 마르가라 언덕의 기슭에 있는 거대한 모스크이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조로 건설된 것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모스크이다. 모스크안에 1만5천명, 마당까지 합치면 한꺼번에 10만명이 예배볼 수 있다고 한다.

 초현대적인 설계로 다른 모스크와는 달리 울타리와 문이 없으며 네 곳의 미너렛(尖塔·높이 90m)은 발사직전의 로켓과 같다. 우리 일행이 모스크로 들어 가려다 제지 당했다. 여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겨우 사정하여 여자들은 2층의 한 쪽 구석으로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우리 남자들은 당당하게 아래층에서 모스크 내부를 볼 수 있었는데 그 큰 건물에 기둥이 하나도 없다. 이곳은 남자들의 나라다.

 모스크 주위에는 전국에서 순례자들을 싣고 온 버스가 20여대 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곳에서도 우리들은 파키스탄 사람들의 구경거리다. 모스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여러명이 옆에 같이 선다. 자기는 그 사진을 받을 수도 없는데도 쏜살같이 다가와 서곤 하였다.

 모스크를 떠나 정부 각 기관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현대적인 거리를 지나니 과연 계획도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파키스탄이 독립 후 한 때 수도는 카라치에 있었으나 1961년부터 이곳의 벌판에 신 수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시가의 기본설계는 그리스의 건축가 「독시마디스」가 맡았다. 거리는 모두 기호로 표기되어 있어 찾기가 매우 편리하다. 같은 계획도시인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본 생각이 났다. 저녁에 라왈핀디로 되돌아 왔다.

 ▲ 1999년 7월25일 (일)

왈핀디를 떠나 간다라의 입구 탁실라를 거쳐 간다라 평야의 국경도시 페샤와르로 가는 날이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비가 와서 그런지 덥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다. 어제 「샤 파이살 모스크」에서 만난 한국 관광객들은 그저께 탁실라의 낮 기온이 45℃였다고 말하였다.

 라왈핀디를 떠나 서쪽으로 달리니 왼쪽에 불모(不毛)의 높은 산이 계속 이어진다. 라왈핀디를 떠나 20분 만에 탁실라에 도착하였다. 탁실라는 엄밀히 말하면 간다라 지방이라고는 말 할 수 없으나 간다라 최대의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동전(佛敎東傳)의 큰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탁실라는 구릉(丘陵) 가장자리의 분지에 있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했을 시대에는 캐러밴(隊商)의 도시였으며 동서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여 부근의 지방을 포함하여 인도인 왕국의 수도였다. 이 탁실라는 영국의 고고학자 제이 마샬 박사의 발굴로 그 전모가 드러났다.

 먼저 탁실라 박물관에 갔다. 들어서자마자 「모오라 모라두」 사원의 스투파(佛塔)의 정교한 복제품이 놓여있고 그 옆에 탁실라 유적 전체의 입체모형이 있어 각 유적의 위치 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박물관의 많은 유물들도 지금 서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 가 있어 귀국 후 다시 예술의 전당으로 가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탁실라 박물관에는 시르캅 등의 도시유적에서 발굴된 일용품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청동제 항아리도 있고 도자기 등도 있으며, 유리로 된 향유단지와 이집트풍의 항아리도 있다.

 또 그 유명한 화장명(化粧皿)도 있는데 아직 그 용도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많은 코인(Coin·화폐)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코인들은 타임캡슐에서 나온 것 같이 귀중한 것이다. 코인의 표면에는 그리스왕의 초상이 있고 그리스어로 그 시대 왕의 이름이 적혀 있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으며 코인의 뒷면에는 그리스의 신들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그때의 간다라 불상에는 명문(銘文)은 있어도 연대는 알 수 없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간다라에서 출토된 코인은 큰 역할을 하였다.

 한 참 이곳 저곳을 보고 있는데 한 구석의 문이 열리더니 박물관 직원이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들어가 보니 비공개된 전시실을 보여주고 팁을 받기 위해서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그런 곳을 보아도 별 의미가 없기에 무시하고 나와 버렸다.

 박물관을 나와 도시유적인 시르캅으로 갔다. 이곳은 바둑판같이 정연하게 구획된 도시로 그리스인이 침입(BC 2세기 전반)한 이후부터 쿠샨왕조 초기(AD 1세기 후기∼2세기 전기)까지 번성하고 있었다. 시르캅은 아시아에 남은 옛 그리스인의 도시이다.

 입구의 큰길을 200m정도 들어가니 스투파의 네모난 기단(基檀·5.8m×6.7m)이 있다. 그 벽에 코린트(corint·기원전 5∼6세기 동안 코린트에서 발달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식의 기둥머리(柱頭) 장식을 한 벽 기둥(壁柱)과 인도식 아치 위에 머리가 두 개인 독수리가 앉아 있다. 이 두 머리의 독수리는 서 아시아가 기원(起源)이며 이것들은 인도, 이란, 그리스의 세 문화가 융화된 결과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쌍두취탑(頭鷲塔·double headed eagle stuper)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정말 헬레니즘(인도문화와 그리스문화의 융합)을 느끼게 한다.

 시르캅의 남쪽 끝에는 비티알 산이 있는데 그리스식 도시로는 이곳이 아크로폴리스에 해당할 것 같다. 문득 아테네에 갔을 때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을 본 생각이 났다.

 시르캅을 떠날 무렵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탁실라에서 비를 맞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하며 무엇보다 덥지않아(28℃)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