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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권력이었다. 구한말 고종은 서구문명을 직수입하기 원했다. 영어를 아는 인재가 필요했다. 육영공원이란 관립 영어학교가 세워졌다. 선교사들도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배우기 열기가 번져갔다. 영어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교육자이며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이때의 영어 열기에 대해 "조선학생은 벼슬하기 위해서 영어를 배운다"고 말했다. 당시 송진우 선생은 선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워서는 쓸데없는 시절이 왔다"며 "영어를 배워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 때 영어는 치부와 출세의 직접적 수단이었다. 지주집안 출신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과 미국 선교사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통역관이 됐다. 그리고 건국 이후 권력핵심에 중용됐다.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군정당시에는 통역관, 건국 이후에는 국회의장과 부통령까지 지낸 이기붕씨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전쟁은 영어를 미국이란 '천국'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격상시켰다. 전쟁기간과 전후 혼란기에 미국은 '천국이다'.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다가 이민을 가고 유학을 가서 출세하고 성공한 인물들을 지금도 본다. 60년대 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영어 권력의 지평을 넓혔다. 정치적 지위 확보 못지않게 경제권력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해졌다. 김우중씨는 70년대 수출영어의 대표적 아이콘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어가 곧 권력은 아니다. 영어를 좀 한다고 해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라는 의사소통수단을 획득하면 경쟁에서 유리해질 뿐이다. 연봉이 다소 높은 회사에 취직할 때 도움이 될 뿐이다. 입사 뒤 영어실력 있다고 해서 우대받는 것도 아니다. 회사가 자신을 평가하는 한 가지 항목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영어 유치원이 생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조기유학을 가고, 기러기 아빠라는 인고의 삶을 견딘다. 대학 졸업도 미루고 영어 해외연수를 가는 것도 필수적 코스로 인식되고 있다. 토익과 토플 등 영어시험시장 규모만 한해에 1조2천억원이다. 통계청은 2006년 영어가 주인 언어학원 매출규모가 1조9천억원이라고 밝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매스콤은 '영어열풍'을 넘어선 '영어광풍'으로 규정한다. 한 사회가 광기에 빠지는 것은 특수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 기간 동안 영어가 곧 권력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권력에 대한 지향성, 그 경험이 '영어광풍'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광풍은 기러기 아빠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이것도 권력지향적이다. 기러기 아빠는 영어습득을 통해 아이가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획득할 것을 바란다. 영어가 곧 권력은 아니지만, 권력지향성은 지금도 여전한 것이다.

차기정부의 영어교육 강화방침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고교만 졸업해도 웬만한 생활영어를 거침없이 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고,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영어교육에 드는) 막대한 투자를 감당할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또 '실용영어'라는 말이 각광받고 있다. 이 말은 문법영어인 교실영어를 확 뜯어고쳐 외국인과 의사소통에 문제없도록 한다는 뜻에서 쓰이고 있다.

'실용영어'는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이란 외피(外皮)를 입고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쟁력으로도 지칭된다. 네덜란드나 핀랜드 등 약소강국 국민들의 영어실력이 모범사례로 소개되고, 싱가폴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같은 국가들의 영어교육을 따라가야 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영어에 대한 노출을 늘리며 몰입교육을 하고, 그리고 실용영어를 추구한다는 새정부의 교육방향에 대한 이의는 없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가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영어광풍은 더욱 거세질 수 있다.

나는 '실용영어'가 정치적 캠페인이 아니라 교육현장에서 실천적 과제로 조용하게 추구되기 바란다. 과거 권력이었던 영어는 조그만 바람만 불어도 광풍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흥찬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