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호야, 대열아 사고 없는 세상에서 편히 잠들거라.」

 3일 오후 3시20분 인천시 중구 연안부두 앞바다.

 바다빛 만큼이나 푸르디 푸른 두 젊은 육신이 한줌의 재가 되어 파도속으로 사라졌다.

 인현동 화재 참사로 숨져간 동인천고 노형호군(17)과 전대열군(17)은 생전에 늘상 붙어다닌 단짝이었던 것처럼 망자(亡者)의 길도 그렇게 떠났다.

 『아들아, 무심한 아들아, 뭐 그리 바빠 이렇게 빨리 떠나야만 한단 말이냐….』

 형호군의 아버지 노상철씨(45·남동구 구월동)는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끝내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합동장례를 뿌리치고 형호와 대열군을 학교장으로 치른건 인현동 화재로 숨진 청소년들에 대한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 일반의 시각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술집에나 들락거리니 이런 일이 생기지…』하며 희생된 청소년들을 불량아 취급하고 있는 일부 얘기꾼들의 따가운 시선이 싫어서였다.

 또 형호와 대열이의 분향소에 하루 100~200명의 동인천고 참배 학생과 교사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더 이상 모두에게 「위로」가 아닌 「고통」이라는 생각에서 부모들이 자청한 것이었다.

 『같은 반인 형호와 대열이는 남들이 생각하는 삐뚤어진 학생이 아니었어요. 부반장인 형호와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대열이는 우리 모두에게 인기좋은 친구였어요.』

 영정을 든 급우 김모군(17)은 이제 사진으로 볼 수밖에 없는 형호의 얼굴에 눈물을 쏟았다. 〈임시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