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다에 무슨일이
며칠 전 필리핀으로 취재차 출장을 갔다. 마닐라에 있는 H호텔에서 만난 중년의 남성이 서툰 한국말로 물어왔다. "도대체 한국 바다에 뭔 일이 났습니까? 바다이야기로 시끌시끌한데"라고(?) 최근 나라 전체가 온통 '바다 이야기'로 벌집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외국에서 까지 한국 바다에는 뭔가 큰일이 난 걸로 알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 속을 지켜보면 바다이야기에는 바다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쓴웃음을 자아낸다. 분명한 건 철 지난 바다이야기에는 바다가 없지만 이야기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견디기 힘들게 했던 지난여름 폭염을 씻어주던 바다와는 또 다른 종류의 바다가 벌써 수십 일째 사람들을 열 받게 한다. 현재까지 '바다 이야기'에서 밝혀진 사실만 봐도 오락기 제조·판매사와 상품권 판매업체, 게임장 업주들, 이들과 공생한 조직폭력배들은 이득을 챙기며 배를 불렸다. 제조·판매사는 몇 년 사이 무려 900억 원의 순익을 챙긴 것으로 추산됐다.
그뿐인가. 상품권 판매회사들도 수십억 원대의 흑자를 내고 게임장 업주들 역시 하루 환전수입만 수백만 원을 챙겨온 것으로 전해졌다.
바다이야기는 전국에 1만5천여 개가 개설돼 있고 게임장의 경품용 상품권 유통 규모가 1년에 30조원. 바다이야기가 아니라 기업이야기다. 지배구조와 지분분포를 모른다. 영업이익률도 그저 추정에 그칠 뿐이다. 도박이라는 멍에를 쓴 힘없는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갈취하다보니 소비자 불만도 있을 리 없다. 이 같은 피해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정부에 있다. 물론 한탕의 헛된 꿈만 쫓아 바다이야기를 들락거린 사람들의 경우 먼저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정부가 이를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까지 하는 건 더 참기 힘들다.
결국엔 이번 '바다 이야기'는 부도덕한 정권의 실상과 국가 관리 능력의 한심함을 그대로 드러낸 꼴이 됐다. 정부는 경마장이나 경륜장 카지노 등 도박산업의 합법화를 꾸준히 벌여왔다. 그것도 모잘라 이번에도 게임장의 불법이나 파행을 방조, 결과적으로 전국에 1만5천여 개의 도박게임장이 기승을 부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부가 도박산업을 합법화시키려는 욕심을 줄이고 사행성 오락을 제대로 규제했더라면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도박장으로 빠져나간 수십조원의 돈은 훨씬 유용하게 유통됐을 게다.
기러기떼는 정확한 간격을 두고 'ㅅ'자 모양을 이루면서 질서정연하게 하늘을 난다. 날개짓도 똑같이 하며 난다. 그 모습에서 질서의 신비함을 느낀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우리는 왜 기러기떼보다도 못한 가"라는 생각이 든다. 기러기 떼 같은 질서는 접어두고라도 계속 터지는 사건속에서 사회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사회 전체는 방향감각을 잃고 헤맨다. 왜 이렇게 되었나. 흔히 '지도자 부재'를 이유로 든다.
요즘 한국 사회는 바로 이 도박중독증에 제대로 걸려든 모습이다. 이미 전국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도 성인용 카지노 게임장인 바다이야기가 우후죽순처럼 번졌다. 심지어 주택가에 인접한 상가마다 하나꼴로 줄지어 늘어선 모습도 눈에 띈다.
언제 이렇게 많아졌나 싶을 정도로 하룻밤만 지나면 새로운 카지노 게임장이 또 생겨난다. 여기에 기가 막힌 사연도 많다. 벌써 여기저기서 누구는 힘겹게 장만한 아파트를 고스란히 날리고 월셋방을 전전한다거나, 누구는 이혼당해 집도 절도 없이 여관방을 떠돈다는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다이야기로 흘러들어간 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민들이 아파트를 판 돈과 이혼당하는 비용이다.
이런데도 정부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다 뒷북치기에 급급한다. 이대로 묵과할 수 없다.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쯤에서 정부도 입장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박을 권장하는 사회는 없다. 인생의 희망을 앗아가고 삶의 활력을 찌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도박이란 것쯤은 알아야 한다. 전국민 누구나 잠재적인 도박중독자로 만들겠다는 심사로까지 읽힌다. 이건 지도자들의 직무유기의 표본이요, 무사안일의 극치이다.덧붙여 '도박 코리아' '대박 코리아'로는 미래를 기대하기가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