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벋어내려 양지바른 곳/두그루 은행나무

푸르러있네/구슬같이 참된 얼굴 갈고 닦아서/보람찬 앞날의 등불이

된다/아아 겨레의 앞장 서서 횃불을 든다/길이 길이 빛나리 우리

부평교』

 계산동 소재 부평초등학교의 교가이다. 가사의 내용처럼 학교 교정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고목 두그루가 마주서 있었다.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드리워 마을 노인들이 와서 쉬고 가을 운동회 때는 나무를 의지해서

만국기가 휘날렸었다.

 수령 500년이란 나이가 가르쳐 주듯 밑둥은 거의 삭아 커다란 구멍이

생겼었다. 그것을 마을사람들은 벼락을 맞아 그렇게 되었다고 했고 광복전

일인교사가 하늘로 오르는 용을 칼로 베어 생긴 자국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고목이면서도 동편의 암나무에서는 가을이면 몇가마씩 열매를

맺어주었었다.

 옛날에는 나무 밑에서 어사가 활을 쏘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교내에는 지금 임금님이 활을 당기고 목욕을 했다는

『어사대』와 『욕은지』가 남아있다. 동교

출신의 이훈익옹에 의하면 조선조 정조임금이 이곳에 왔었다고 한다.

김포의 장릉행 귀로에 다녀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73년 박광성 교수는

『욕은지와 어사대에 대하여』에서 정조의 장릉행은

인정하면서도 어사대가 어느 왕과 관련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1899년 개교한 동교가 뜻깊은 100주년을 맞았다. 동교는 그동안 몇차례

교명이 변경되었다가 1969년 옛 이름 『부평초등학교』를

되찾은 바 있는데 고로들중에는 경상도 사투리의 호랑이 이환구 선생님의

일화를 회고하는 분들이 많다. 평소 검소하여 자전거 통근을 하는데다

자녀들을 동교로 전학시키고 학교주변 식목에도 앞장섰다. 그분은 광복후

여러해 교장도 지내셨는데 적십자지사장을 지낸 이영호 박사의 선친이시다.

 지금 계산동은 예전의 농경지에서 완전히 환골탈태되어 있다.

땅밑으로는 지하철이 관통하고 기름졌던 벌판은 고층의 아파트숲으로

변모했다. 다만 모습을 변치않고 의연한 계양산과

『부평』이란 교명이 옛날의 고을원이 살았던 부평읍을

지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