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넝쿨장미-36
"그런데 그 여자 회사를 그만두고는… 어린애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어린애를 데리고 사라지다니?”
“그러니까 아이를 데리고 행방불명이 됐다는 얘기죠.” 나는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한 나라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희생되었던 여자애가 또 다시 세월의 피해자가 되다니. 그것도 다방과 식당과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살아가던 아가씨가. 나는 그 순간 한 인간이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의해 희생되고 짓밟히는가를 생각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살아가던 어느 위정자는 말했다. ‘시련에 응전함으로써 시대를 움직인다’ 고. 그러나 소희는 시련에 응전해 보지도 못하고, 또 시대에 항거해 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갔다. 그리고 아직도 시대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끼인 채 신음하고 있었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 나 있는 역사의 깊은 상처를 껴안고.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차지연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선배, 그 여자하고 무슨 일 있었군요.”
“그 그게 아니야.”
. “뭐가 아니에요?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
“이제 출발하세요.” “어딜 가려고?” “저녁 먹으러 가야죠.”
“아, 그렇지…”
나는 허둥지둥 승용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유흥업소들이 몰려 있는 ××동 쪽으로 향했다. 그날 나와 차지연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마음껏 웃고 떠들고 소리치며. 나는 오랜만에 일과 직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의 자유분방한, 어찌 보면 일상을 일탈한 것 같은 행동은 늦은 밤 택시 승차장 앞에서 멈추었다. 우리는 저녁 내내 꽤나 많은 술을 마셨다. 물론 일차는 갈비를 구워서 밥과 함께 먹었고, 이차로 생맥주집에, 그리고 삼차는 나이트클럽으로 진출해서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술은 취하지 않았다. 마치 술에다가 순도 높은 각성제를 다량으로 타서 마신 것처럼.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희에 대한 반성과 죄책감이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막상 술에 취한 건 내가 아니라, 차지연이었다.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선배, 저 아무데나 데려다 줄래요?”
차지연이 내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가 밤 두시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늦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더구나 유키코는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집 앞에 나와 서성거리며.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차지연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내 유키코의 얼굴을 떠올리며. 차지연이 속이 메스꺼운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가지 마세요.”
내가 택시의 문을 닫으려 하자, 차지연이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자기 쪽으로 힘차게 잡아당겼다. 나는 비칠거리며 택시 안으로 쓰러졌다. 물컹거리는 여자의 젖가슴이 몸에 느껴졌다. 나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일어서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녀의 품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나 처음부터 선배가 좋았어요.”
의외의 말이 차지연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