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인천종합문예회관에서 열린 시장님의 두번째 취임식을 지켜봤다. 취임선서 때 바짝 긴장한듯한 표정을 보면서 언뜻 1996년 15대 총선 시절을 떠올렸다.. 바바리코트 깃을 한껏 올린 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그때 모습은 정치 초년생이라기보다 오히려 촌티마저 풍겼었다. 당시 박찬종 씨의 추천으로 계양구에 공천을 받은 안시장은 그야말로 정치 초년생이나 다름없었다. 출마를 하면서 그나마 충청도 출신으로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인천중학교를 졸업한 인연으로 지역연고를 내세울 수 있었지만 지역민심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결국 계양구에서의 첫 출마는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안시장의 낙선 기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50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의 인천시장 후보로, 98년 시장선거에 출마 하기도 했다. 당시 인천에는 어느 누구도 시장 선거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던것은 모두가 잘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야당 후보는 갖가지 제약과 걸림돌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후보로 선정된 이윤성 당시 국회의원이 출마를 포기했겠는가. 결국 한나라당의 후보라는 공은 안시장에게 넘어울수밖에 없었다. 안시장은 지금도 ‘낙선이 뻔했지만 망설임없이 당의 명령에 받아들였다’고 당시 심정을 밝힐정도 였다. 결국 당시 재선에 나섰던 최기선 시장은 연임에 성공했고, 개표가 끝난 뒤 선거 캠프 사무실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안시장은 깡소주로 감정을 추스리는 모습을 선거관계자들에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시장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바로 지역활동에 열중하는 대단한 집념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 1년 뒤인 99년 6·3보궐선거에서 결국 금배지를 달았다.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합공천을 받은 송영길 후보를 누른 것은 당시 최대 이슈였다. 옷로비 사건의 영향도 있었지만, 야당 후보로서 3년간 지역을 다져온 노력의 결과였다는것이 당시 지역 정가의 공동된 분석이었다.
그러나 2000년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는 또 다시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당시 최대의 이변으로 기록된 이 선거결과로 안 시장님은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야했다. 10개월에 불과한 의원생활 끝에 찾아온 야인생활,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선거에서 떨어진 국회의원은 사람도 아니다’는 정치 격언에 맞게 안시장님은 또다시 세인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2002년 지방선거. 패배의 연속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안시장은 이미 준비된 후보나 다름없었다. 이윤성, 민봉기 등 현역의원들과의 경선을 거쳐 본선에 나선 안시장은 결국 시장선거에서 승리했다. 햇수로 11년간 여섯번의 선거, 2번의 경선을 경험한 정치인은 인천지역에서는 그리 흔치않다. 안시장 나름대로 선거에 있어서 또다른 인천의 역사를 기록한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4년 시장임기 동안 보여준 안시장의 모습은 여전히 10년전 바바리 깃을 세우고 정치일선을 누비던 그모습 그대로다.. 때로는 여론에 밀려, 때로는 측근의 구설수에 밀려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흔들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재선에 성공한 요즘에도 시청 주변에서는 여전히 안시장에 대한 구설이 끊이지않고 있다. 경선과 선거과정에서도 그렇고 형제들의 구설에 관해서도 그렇고 여전히 구설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안시장은 여전히 인내하고 있다.
앞으로 4년은 인천에서 가장 중요한 때다. 향후 인천의 100년을 좌우할 경제자유구역, 구도심권 개발, 민생복지 정책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것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달콤한 소리는 떨쳐버리고 가장 어울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늘 긴장하며 주변의 일거리를 찾아 직접 챙기는 모습을 계속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평소 안시장이 강조했듯 “인천시장 자리는 여전히 고난의 자리일 뿐 앞으로 4년이 솔직히 두렵다” 고 말한 당선초심을 잃치 않는것도 인천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될수있다고 생각해서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