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넝쿨장미-31
 나는 차지연의 제의를 아무런 이유없이 받아들였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도 소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소희가 광주사태 이후 계속 학교를 다녔는지, 아니면 피해의식과 절망감으로 인해 삶을 포기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아니, 나 자신이 그때 이후 광주의 일을 망각한 채 살아왔다. 그저 어느 오월에 꾸었던 잔인한 악몽이라고 생각했을 뿐.
 
 “선배, 오늘 저녁 술 한잔 사주실래요?”
 어느 토요일 오후, 차지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은 당황했으나 이내 정색을 하며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이 있어?”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냥 선배하고 술이 마시고 싶어서요.”
 “별일 없다면… 그러지 뭐.”
 “별일은 없을 거예요. 지부장도 한동안은 조용히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며칠간 위장취업자 수사를 하다가 다시 대인 감시업무로 복귀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지부장과 해직교사들의 동향을 감시했다. 물론 뚜렷한 사건도 없었고, 돌발적인 행사도 열리지 않았다. 그저 따분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매일같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간 전대협 간부를 검거한 직원이 일 계급 특진하는 경사가 있었고, 한바탕 소란스러운 축하 파티도 열렸다. 그리고 그 일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던 계장의 위신도 어느 정도 올라갔다. 그러나 좌경업무라는 게 강력반 형사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과는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움직이고 계획하고 추진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니 직원들이 일제히 사건 속으로 잠적해 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결국 우리는 또 다시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속으로 되돌아갔다. 즉 매일같이 전교조 지부를 감시하고, 좁은 승용차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넝쿨장미의 향을 맡으며 무언가를 기다려야 했다. 사정이 그러니 차지연이 술을 사달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별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면 지루한 일상이라도 깨뜨려야 했으니까.
 “우리가 팀을 이룬지 두 달이 됐잖아요. 그러니 기념주도 마실 겸 어때요?”
 “난 괜찮은데… 집사람이 걱정할까봐.”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유키코를 생각하며 말했다. 차지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 결혼한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쩔쩔매요?”
 “아니, 그냥… 늦게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언니가 재일교포라서 그런가?”
 차지연은 심통이 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마른기침을 큼큼 하며 지세로 고쳐 앉았다. 그녀가 한동안 넝쿨장미를 바라보더니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선배, 우리 정식으로 사귀어보지 않을래요?”
 “사귀다니?” “그러니까 연애라는 걸 한번 해보자는 거죠.” “난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야.” “유부남이라고 연애하지 말하는 법이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나는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유키코와 결혼한 지 십여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한눈을 팔거나 딴 짓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며 사랑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물론 딸아이가 커가면서 부부간에 서먹한 점이 생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국적을 초월한 사랑답게 둘 사이의 관계는 진실하고 돈독했다. 그런데 다른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