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이야기]살라리 별곡(4)

홍순민/ 국사학 박사/ 명지대 격원교수

 우선 우리 동네 이름은 우리 동네 어른들로부터 지금껏 변함없이

살라리라고 불려왔다. 그런데 누가 무슨 근거로, 무슨 권리로 남의 동네

이름을 마음대로 바꿔서 살나리로 부르는가?

 더구나 살나리는 발음하기 조차 심히 어려운 바 발음의 구강

경제원칙에서부터 전혀 어긋난다.

 더욱 한심하고 우스운 사실은 살나리를 한자로 「殺拿里」로

표기했다니? 지명에 이러한 한자를 쓰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어느

동네 노인들이 자기 동네 이름을 짓는데 이렇게 끔찍하게 혐오스러운

사형장 고사를 생각해서 지을 미친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정확하게 자기 동네 지역도 아닌 딴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형장

고사를 끌어다가 자기 동네 이름을 짓겠는가?

 지금 살라리에 살고 계신 동네 어른들 몇 분은 그 부모님들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살라리가 생긴 역사는

1920년대로 비교적 짧다. 지금 살라리에 사시는 노인들의 부모님때 이

동네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동네 처음의 옛 노인들이 누구 누구이신지

거의 뻔하다. 그런데 한글 발음과 한자를 인위적으로 설정하여 놓은

다음에 이에 맞추어 그 유래를 설명하는 억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곳이

사형집행장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살라리는 부평 읍내에서 동쪽에 있다. 옛날 사람들은

동쪽은 오행상으로 목(木)이요 계절로는 봄(春)이요 생육(生育)의

방위라고 생각했다. 그런 동쪽에 사형장을 둔 적이 없다. 사형장을 둔다면

서쪽에 두었다.

 둘째, 살라리는 부평도호부에서 서울로 통하는 큰 도로를 가운데 두고

생겼다. 서울로 가는 대로선상에서 사형을 집행하였겠는가? 도대체

부평도호부의 首長이 매일 아침 문만 열면 훤히 내다보이는 동쪽 버판

자기 코 밑에다 사형장을 만들었겠는가? 종합적으로 볼 때 위 사형장

이야기는 근거가 박약한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계양산에서 개화산, 굴포천을 가운데 두고

먼마루(원종동)까지 질펀하게 펼쳐진 기름진 벌판은 1920년대까지는

갈대밭(蘆地)이었다. 이 갈대밭을 일본인들이 한강수리조합을 만들어 그

회사를 중심으로 개간하여 훌륭한 논으로 만들었다.

 부평읍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과 한강수리조합 관개수로(데보)가

만나는 지역에 일본인 班田氏의 농장 창고가 있었다. 살라리 동네는

1920년대 한강수리조합 회사가 관개수로를 파고 갈대밭을 농지로 개간할

그 즈음에 계양산의 한 자락 끄트머리에 있던 班田氏 농장창고 근처에

농사지으러 모여든 농민들로 이루어진 농촌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