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 임지현, 박노자 등이 펴낸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책이 있다. 책은 우리 일상 곳곳에 배어있는 갖가지 파시즘적 기제들을 꼼꼼하게 들춰내 적잖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일테면 맹목적 반공주의라든지, 완고한 가부장적 문화 역시 파시즘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를 건냈다.
저자들은 또 ‘국가안보’니 ‘국제경쟁력’등들 들먹이며 국민들에게 이를 위해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것 역시 파시즘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때 국가 권력기구는 위로부터의 파시즘을 강제하는 정치적 기제가 되는 셈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 촌스럽게 물리력을 동원하는 권력은 그리 많지 않다. 대신 언론과 자본이 ‘국익’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들로 하여금 희생과 헌신을 강요한다.
일테면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작금의 양상이 그렇다. ‘세계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라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 앞에 일체의 반대논리는 ‘국익에 반하는 행위’가 된다. 잘 봐줘야 ‘순진하고 소박한 소리’ 정도다.
이미 70년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악다구니 속에 혹독한 파시즘을 익히 경험해온 세대들에게 ‘세계는 목하 경제전쟁 중’이라는 섬뜩한 의제를 내건 국가와 언론, 자본의 공세는 친숙하다. 70년대 국익이데올로기라는 거시적 파시즘은 오랜 세월 ‘국민’이라는 집단 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이제는 ‘경제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체계로 굳어진지 오래다.

 전 세계를 질풍노도처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러한 ‘우리 안의 파시즘’에 힘입어 거침없이 한반도마저 뒤덮고 있다. 수많은 농민들이 농약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여도 그 물결을 멈추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부와 언론, 자본은 ‘안타깝지만 갈 길은 가야한다’는 식으로 과감히 뭉개며 지나가고 있다.
학교와 가정, 보수언론으로부터 차고 넘칠 만큼 국가민족주의와 가부장적 규범을 학습한 대다수 국민들 역시 이러한 정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거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물결 앞에 신념과 이성을 앞세운 소수의 항변은 언제나 묻혀버리기 일쑤며, 심지어 ‘대의’를 앞세운 폭력에 의해 무너지기도 한다. 최근 한달 동안 파란의 현장이었던 평택미군기지이전터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역시 그렇다.
여기에는 반 세기 넘어 우리 겨레의 숙명적 족쇄로 작용해온 국가안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고하게 버티고 있다. 미국이라는 혈맹(?) 역시 상당수 국민들에게 있어 여전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남아있다.
‘국가안보’와 미군을 위해 땅을 내주기로 국가가 결정한 터, 이에 맞서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간 보여준 정부의 의지다.
보수 언론 역시 이에 적극 맞장구치고 있으며, 일부 극우인사는 시위대를 향한 ‘발포’운운하기도 했다. 나라와 민족의 이익이라는 큰 뜻 앞에 개인의 이익이나 인권쯤은 얼마든지 양보되거나 침해돼도 좋다는 파시즘의 망령이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를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학생들, 심지어 국회의원의 이동과 집회의 자유는 엄청난 규모의 경찰력에 의해 일찌감치 차단됐다. 국가이익에 반하는 주민들의 인권은 얼마든지 제한되어도 좋은지, 상주하는 경찰들에 의한 인권침해 고발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거침없는 억압과 폭력 앞에 지금 황새울은 울고 있다.
제아무리 대의와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절차와 과정의 민주성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폭력이다. 다수의 의지를 앞세워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의 권익을 훼손하려 한다면 그건 야만이다. 마찬가지로 힘없는 농군과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삼아 ‘국가 경쟁력’의 휘황찬란한 탑을 쌓아올린들, 그건 바벨탑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임지현은 이렇게 말한다. “더러 전통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아니면 국민의 이름으로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을 고사시키지 않는 한 진정한 개혁 또는 변혁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송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