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봄잠에 새벽 온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곳곳에서 새 소리가 들린다
밤새 비바람 소리에
꽃이 많이 떨어졌겠지.)
능산의 시를 받아 방주가 구성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閑居隣竝少
草徑入荒園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한가로이 거처하니 이웃도 드물고
풀숲 오솔길은 거친 정원으로 통한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자고
중은 달빛 아래서 문을 두드린다.)
능산이 앞서 읊었던 오언절구는 맹호연(孟浩然)의 춘면(春眠)이라는 시였다. 나는 그 시를 막힘없이 읊는 능산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돌중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맹호연의 시를 거침없이 외다니. 나도 춘면이라는 시는 무척 좋아해서, 20대 때만 해도 늘 노래처럼 암송하고 다녔다. 그런 시를 이런 곳에서, 그것도 능산의 입으로부터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사실 맹호연은 두보(杜甫)와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당시(唐詩)는 호방파(豪放派)와 유정파(幽精派)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맹호연은 유정파에 속했다. 물론 유정파의 대표는 왕유(王維)였지만, 맹호연도 왕유에게 유정파적 자질을 인정받았다. 타고난 성격도 소탈하고 탈속적인 데가 있었던 맹호연을 나는 왕유보다 더 좋아했다. 그런데 능산이 맹호연의 시를 좋아하다니. 더구나 방주라는 사람이 읊은 시는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읊은 오언율시(五言律詩)는 당나라의 무명 시인 가도(賈島)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가도가 ‘이응의 그윽한 거처에 붙여’(題李凝幽居)라는 시를 지을 때 있었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즉 가도는 시의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 민다’(堆)로 해야 좋을지, ‘두드린다’(敲)로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다가, 그 앞을 지나가던 한유(韓愈)를 만나 물어보고는 ‘두드린다’(敲)로 최종 낙점했던 것이다. 그 일화로 글을 고칠 때 퇴고(堆敲)라는 말을 쓰게 되었으니, 가도와 한유가 만나 주고받은 말은 가히 당대 최고의 대화였던 셈이다. 내가 멍하니 앉아 있자 신이 난 능산이 한 수를 더 뽑았다.
“日出而作 日入而息
耕田而食 鑿井而飮
帝力何有於我哉.”
(해 뜨면 일어나서 일하고 해 지면 돌아와 쉰다네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물마시니
임금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능산이 격양가(擊壤歌)를 소리 높여 읊조리자, 방주가 빙글빙글 웃으며 곧바로 받았다.
“登彼西山兮 採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兮 命之衰矣.”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는다
포악을 포악으로 바꾸며 그 잘못됨을 모르는구나
신농, 우, 하의 좋은 전통이 홀연히 사라지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아, 슬프도다. 명이 땅에 떨어졌구나.)
방주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채미가(采薇歌)로 능산이 암송한 격양가를 빈정거렸다. 그러자 능산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사실 채미가는 백이와 숙제가 무왕(武王)의 폭정을 피해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부른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