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도시가 된 터라 그렇지도 않지만 예전의 서호는 수원의 상징이었다. 서호하면 수원을 생각케 하고 수원하면 서호를 연상할 만큼 서호는 유명했었다. 예전 어른들의 학교 졸업앨범을 보면 대개 서호를 배경으로 촬영한 수학여행 장면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그 시절 경인지방에서 수원은 곧잘 수학여행의 목적지가 되었었다.

 서호는 정조임금의 수원천도 계획과 함께 축조되었다. 화성을 축성한 뒤인 1799년이었다. 정조는 서울을 옮기려면 백성이 따라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생업을 진흥시켜야 되는데 그 토대가 농사용 저수지였다.그때는 서호뿐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4대 저수지를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존하는 것은 서호와 속칭 조기정방죽이라 불리던 북지가 송죽동 경수국도변에 있으나 많이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수원 인근에는 저수지가 많다. 시민의 상수원인 광교저수지 말고도 일월 원천 신대 저수지가 있고 수원시 관내가 아닌 인근의 용인 화성에 크고 작은 관개용 저수지가 산재 경향의 강태공들이 찾아든다.

 그중에서 원천저수지는 수원시민이 많이 이용하는 유원지이다. 시민중 그곳에 한 번이라도 아니 가본 사람 없을 정도이며 예전에 다녀간 추억을 회상하는 분들도 많다. 아직 수려선 철도가 왕래하고 42번국도가 확장되기 이전이던 시절 수려선 협궤열차나 시외버스로 황토 먼지 나는 비포장을 달려 닿았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원지로서 요란하지도 않았고 제방을 걸어 건너편까지 갔다가 오거나 간혹 보트를 탔었다. 그리고 초가의 장어구이나 처녑국집이 몇채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본지 23일자 일부 지역판에 상반된 원천저수지에 대한 기사가 실려 어리둥절케 한다. 즉 원천저수지를 4계절 전천후 휴양지로 개발한다는 것과 최근의 수질악화로 농업용수로도 불가할 만큼 되었다는 내용이다. 휴양지도 중요하나 수질의 정화 노력이 병행되어야겠다. 항용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훼손되는 것은 언제나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망가뜨리는데 사람의 손길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