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페르가나-‘꽃 핀 거리’ 쿠와엔 잡초만 무성
 “다시 강국에서 동쪽은 발하나국(페르가나)인데, 왕이 두 사람 있다. 시르다리야라는 큰 강이 한복판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간다. 강 남쪽에 있는 왕은 대식에 예속되어 있고, 강 북쪽에 있는 왕은 돌궐의 관할하에 있다. (중략)언어는 각별하여 다른 나라와 같지 않으며, 불법을 알지 못한다. 절도 없고 승려도 없다.”
 8세기 초, 신라의 명승 혜초 스님은 천축국인 인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의 페르가나 지역을 이같이 알려준다. 그리고 불법을 모르는 페르가나와는 달리 유일하게 소승불교를 믿는 나라를 소개한다.
 “발하나국 동쪽에 나라가 하나 있는데 골탈국(쿠탈)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 왕은 원래 돌궐 종족 출신이고, 이곳 백성의 반은 호족이고 반은 돌궐족이다. (중략)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경신하고 절과 승려가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이로 미루어, 중앙아시아는 8세기 초반까지도 시르다리야를 경계로 남쪽은 아랍의 우마이야조가, 북쪽은 서돌궐의 돌기시가 지배하며 불교가 없었던 데 반해, 페르가나 동쪽의 쿠탈에는 불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쿠탈은 어디일까. 아마도 그곳은 쿠와(Kuwa)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쿠와는 불교가 번성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무역의 중추를 담당한 소그드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꽃 핀 거리’라고 부른 쿠와는 페르가나에서 40㎞ 떨어진 곳에 있다. 페르가나 계곡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시르다리야 북부지역의 중심이 아크쉬켄트(Aksikent)라면, 남부지역의 중심은 쿠와라고 한다. 특히 쿠와는 동서교통의 요충지로, 일천 개가 넘는 실크로드 중 금 세공품이 지나가는 도로에 위치해 “쿠와의 왕이 되면 모든 페르가나를 지배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져 온다. 혜초 스님 또한 이러한 실크로드의 요지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신선한 오월 아침, 쿠와가는 길은 도시 이름에 어울리게 도로변 듬성듬성 꽃담장이 보인다. 도로포장도 비교적 잘 되어 있어 페르가나 시내에서 30분이면 충분하다. 쿠와 유적지에 도착하니 유적지는 보이지 않고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10세기 이곳 쿠와 출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흐마드 알 파르고니다. 파르고니는 일식과 수심을 측정하는 기계를 만들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였다는데, 그의 이러한 업적은 11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알려졌으며, 13세기에는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될 정도였다고 한다. 고래로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은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많은 위인을 배출했는데, 모름지기 캬라반을 이끌고 오랜 기간을 여행해야 하는 실크로드 무역과, 각국의 물품들에 대한 수치의 통일화 과정에서 발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쿠와 사람들은 파르고니를 자랑스럽게 여겨 뭇 선남선녀들이 결혼식을 올리고는 반드시 그의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파르고니처럼 뛰어난 2세를 얻기 위한 바람이리라.
 파르고니 동상이 있는 광장을 넘어서면 쿠와 유적지가 펼쳐진다. 그러나 쿠와 유적지 또한 폐허인 채 잡초만 무성하다. 쿠와는 기원전 1세기경에 도시가 형성되고, 5세기에는 크게 번영했다고 한다. 7∼8세기에는 혜초 스님도 목격한 바 있듯이 불교가 성행해 이 넓은 들판을 불교사원으로 가득 채웠을 텐데, 지금은 이름모를 풀들만이 그날의 번영을 되새기려는 듯 과객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이들 사원이 사라진 것은 8세기 아랍의 회교도들이 점령하면서부터였는데, 그들의 건축물 역시 징기즈칸의 침략 때 폐허가 되었으니 이 또한 업보요, 공수래공수거인 인생이리라.
 쿠와 유적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대불 다음으로 큰 불상이 발굴되어 고고학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출토된 불두(佛頭)는 93㎝인데 불상은 최소 4m는 넘음직하다. 더군다나 탈레반정권에 의해 인류의 공동유산인 바미얀 대불이 사라진 지금, 이곳에서 출토된 불교유적은 더없이 소중하다 하겠다. 역사는 찾는 자에게만 가르쳐주던가. 예산문제로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한 쿠와 유적지에서 소신 하나로 뛰어든 일군의 젊은 고고학도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단언한다. 올바른 역사는 스스로의 옹골찬 소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쿠와에서 출토된 유적은 페르가나 박물관보다는 타쉬켄트 국립역사박물관에 잘 보관돼 있다. 페르가나 박물관은 발굴 당시의 사진과 유물 조각들만을 전시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 관한 전시물이다. ‘페르가나주에 사는 고려인들’이란 제목의 전시물은 남북한의 지도와 국기, 그리고 간단한 역사와 빛바랜 사진 몇 장이 고작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글로 된 전시품의 감상은 뿌듯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약자로서 통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2002년 월드컵을 치루며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한민국의 성숙함과 삼성, 엘지 등 세계적인 우수기업들의 중앙아시아 진출, 그리고 각종 미디어를 통한 한류열풍은 분명 열사의 대륙 한 모퉁이서 시련의 세월을 이겨낸 고려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의 세계적인 활동들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에게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중앙아시아로 애정의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우리보다 먼저 힘든 여정을 닦은 형제자매가 있다. 그리고 이들과 어울려 사는 벗들이 있다. 이들 모두와 어깨동무하고 춤출 때,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