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학술제'서 김창수 위원 밝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인천이 낳은 뛰어난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상임연구위원은 인천민예총 주최로 25일 인하대 정석 학술정보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우현학술제’에서 서울대 규장각에 찾은 우현의 조부 고운경의 ‘인천항 축항 외동 호적대장’을 공개하며, “그동안 우현에 대한 전기적 연구에서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던 가계(家系) 조사는 발견된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할 수 있게됐다”고 밝혔다.
 이날 김 연구위원이 공개한 호적대장은 고유섭의 조부 ‘고운경’이 호주로 돼 있다. 이 호적대장에 따르면 우현의 조부 고운경은 당시 나이가 44세(1855∼1916)이며, 본(本)은 제주, 직업은 상업, 인천 축항 외동으로 이사오기 전 서울 용산방(龍山坊)에 살았다.
 그동안 고운경의 전 거주지는 평북 의주, 충청도, 강원도 정연 등으로 지적돼 왔다. 우현의 아들 재현씨도 지난 8월에 열린 우현 기념전에서 전 거주지가 충청도였다고 밝힌바 있다.
 김 연구위원은 “호적과 가족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고운경의 전 거주지는 용산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인천으로 이사온 시기는 1883년에서 1898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며 “물론 서울 용산 이전 거주지가 충청도 일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현의 생부 주연의 생몰연대와 형제, 혼인 관계도 확인됐다. 고운경의 차남 주연은 임오년(1882년) 1월9일 태어났으며, 1940년 만주에서 사망했다. 고운경의 자녀는 광무 2년(1898년) 당시 모두 5명. 장남 주상(珠常·당시 25세)은 1898년 운경의 형 운흥의 가계로 양자 입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고운경의 장남 주상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우현의 3·1만세운동 참여와 연관되는 주요한 단서”라고 강조했다.
 1919년 창영보통학교 재학 시절 우현의 3·1만세운동 참여 여부는, 동문 배영복씨의 “경찰서에 잡혀간 우현이 큰아버지의 보증으로 석방됐다”는 증언에 따랐다. 그러나 호적대장 확인 전까지 우현의 아버지 주연이 장남으로 알려져 이 같은 사실에 의문이 제기돼 왔다.
 우현의 삼촌으로 저명한 외과의사이자 대중일보 사장을 역임했던 주철(珠徹·1893년 생)은 호적상 주일(珠逸)과, 인천세관장을 지낸 막내삼촌 주홍(珠泓·1896년 생)은 호적상 주명(珠明)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고운경의 집은 축현리 외동에 19간 규모의 초가였으며, 고용인 2명이 함께 살았다. 김 연구위원은 “당시 평균 가옥 규모가 9.41간이었던 점에 미뤄 상업에 종사한 고운경은 중류 이상의 계층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김 연구위원은 “고운경의 호구표가 발견됨으로써 우현의 가계에 대한 기존의 전기적 연구 중 일부는 수정돼야 한다”며 “우현의 탄생지인 인천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 중요한 시사점을 지닌 우현의 미적 사상을 검토하기 위해 마련됐다. 매년 인천민예총이 벌여오던 것으로, 올해는 ‘과학과 역사로서의 ‘미’의 발견’을 주제로 당시 문학과 연극, 건축 등 다양한 미적 장르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근대예술 개념의 정립과 발전에서의 우현의 위치를 살폈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