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종가명가> 영일 정씨(하)
 영일(迎日) 정씨(鄭氏)가 인천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 시점은 약 400년전인 1607년이다. 영일을 본관으로, 각 처에서 핏줄을 이어오던 정씨 문중이 인천과 인연을 맺게 된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승지공파의 시조 승지공 정여온(鄭汝溫)과 관련된 전설은 지금까지 후손들에게 회자되며 선조들의 덕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다.
 1607년, 당시 인천 원우면 청량산 일대에 두 명의 선비가 나타났다. 이들은 다름아닌 승지공 여온과 지관이었다. 이미 수개월을 전국을 돌며 부친 정제가 묻힐 명당을 찾아다니던 이들은 청량산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명당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명당진결의 요체이며, 음택요결의 가장 중요한 부위에 초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들은 내심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아쉬움속에 집 근처를 배회하던 중 초가집에서 한 노파가 나와 연유를 물었다. 그러나 두 선비가 모두 아무말 없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쾌감을 감추지않은 채 이들의 얼굴을 주시하던 노파는 별안간 여온의 앞에 부복하며 옛일을 회상했다.
 과거 노파의 남편 김모씨는 생활이 곤궁해 관아의 재물을 유용했다. 일시 변제를 하고는 다시 유용해 쓰는 것을 반복하던중 형편이 여의치못해 변제를 못하게되자 두 부부는 마포나루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이때 이를 본 정여온이 이들을 구하고 자신의 재물을 미련없이 모두 주고는 헤어졌다. 물론 이들이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리곤 10여년이 지난 뒤 인천에서 이들을 재회한 것이다. 이들은 여온이 인천을 찾은 이유를 듣고는 평생을 거처해 온 초가삼간을 미련없이 내어주고는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당시 자신의 거처를 정씨 묘역으로 내어 준 김모씨의 후손이 인천 운현동 연락골에서 명문대성을 이루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렇게해서 형성된 영일 정씨 묘역은 청량산 동록 동춘동 177번지와 동남쪽으로 뻗은 산 56-1, 산 58-1에 위치해 있다.
 177번지는 속칭 능어리(陵御里)로 판결사공 정자원(鄭自源)을 비롯하여 6세손 제(濟), 9세손 시성(始成), 11세손 수기(壽期), 정수기의 부인 안정나씨(安定羅氏)와 아들인 우량,휘량 형제 및 손자 원달(遠達)의 묘가 자리한다.
 동춘동 56, 58번지는 속칭 도곡(道谷) 혹은 동막(東幕)이다. 이 곳에 정제의 아들 승지공(承旨公) 정여온(鄭汝溫)과 아들 용(涌)의 무덤이 있다.
 동춘동 영일 정씨 묘역은 인천의 토착세력의 분묘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것이다. 인천에 영일 정씨가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명종∼선조조에 효능참봉(孝陵參奉)을 지낸 정제(鄭濟)가 내려 온 이후였다.
 특히 정제의 6세손인 정수기와 그의 두 아들이 현달하면서 영일 정씨는 조선후기 인천의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정우량의 둘째 아들 치달(致達)이 화원옹주(花緩翁主)의 부마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1990년 동춘동 일대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면서 묘역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본래 동춘동 도곡에 있던 정우량·휘량 형제의 무덤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으며, 정시대(鄭始大)의 무덤이 홍성으로, 시승(始昇)과 수방의 무덤은 파주로 옮겨졌다. 파주의 선산도 1992년 통일동산 조성으로 일부 이장이 불가피 하자 동춘동 정씨의 중시조 격인 자원(自源)의 무덤을 모셔 왔다. 이 과정에서 묘역 전반에 석물과 비석을 개각하여 옛 모습을 잃은 것이 적지 않다. 다행히 1949년 조사한 묘비문의 필사본이 남아 있어 이의 대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동춘동 영일정씨의 묘역은 문중의 역사는 물론 인천지방사의 이해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크다. 오랜 묘비의 필적에는 볼만한 것이 많고, 문중 소장의 여러 문헌 자료에는 인천 관련 기록도 적지 않다. 묘역은 후손에 의하여 잘 관리되고있는 편이다. 능어리의 묘역에는 지난 1995년 동곡재(東谷齋)라는 장대한 재실도 마련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일 정씨는 남한에 총 5만7천504가구, 23만7천2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가 있다. 마을에서 1Km 남짓한 문수산 기슭에 영일 정씨의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으며, 후손들은 조상을 묘를 지키며 근 200여년간을 산아래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40여 가구가 정씨 한 집안으로 동네에서 출세한 사람은 없지만 인근에서는 양반동네로 알아준다.
 /조태현기자 blog.itimes.co.kr/cho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