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동까지 돌아가는 여정을 고려, 새벽 6시 집안을 출발했다. 찾아왔을 때와는 반대로 통화를 거쳐 황톳길로 해서 환인과 관전을 지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겁부터 난다. 처음 만난 일가 친척과 작별하는 기분이다. 새벽인데도 릭샤를 끄는 조선족 동포들이 덩달아 호텔앞까지 나와 서성이며 못내 서운해 하는 표정이다.

 집안시내를 벗어나는 고갯길 오른쪽 멀리 장군총을 내려다 보며 통화의 동방공원 경내의 호텔에 버스를 세운 것은 아침 8시였다. 조반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를 오전 내내 정오가 지나서야 환인의 먼젓번 신세진 조선족의 작은 식당 조중반점(朝中飯店)에서 쉬었다.

 식당주인은 물론 조선족-비록 한복 차림이나 우리말을 못하는 중국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자리한 방은 밤에 노래방이 된다고 했다. 지금 중국에는 변방까지도 노래방이 대유행이란다. 도시의 경우 처음에는 가라오케가 들어왔다가 노래방이더니 지금은 사우나라고 한다.

 식사후 이웃의 조선족 학교에 가 보았다. 교문의 간판은 「환인만족자치현 조선족중학」-교문을 들어서 정면에 백색의 산뜻한 4층의 교사가 좌정하고 「근로 경사(敬師) 봉헌 향상」의 교훈이 걸려있다. 우측에는 구관인듯 낡은 교사가 있는데 좌측에도 5층의 교사를 짓고 있어 교포 교사에게 물었더니 고등기술학교와 전문학교를 건축중이라고 했다.

 이번 여행중에는 이곳 말고도 두곳의 조선족학교를 방문한 바 있다. 단동에 도착하던 날의 「단동시조선족중학」과 집안에서의 「태왕향조선족소학」이다. 45년 개학했다는 단동의 중학교는 바로 압록강공원 곁에 있다. 토요일의 늦은 오후인데도(중국은 주5일 수업 토요일에는 쉰다) 강변쪽으로 버드나무가 나란히 선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학생들로 교실안에는 자습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어느 사회이든 학교는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로 활기차기 마련이다.

 가천재단에서 마련해온 도서를 최상근 교장(51)에게 전달하고 현관안으로 들어서니 「단결 성실 근면 향상」의 교훈이 걸려 반긴다. 그리고 속담유래게시판이라는 것이 있는데 기간을 두고 교체하는듯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 가서 눈흘긴다」는 내용이어서 친근감을 주었다. 현관에서 2, 3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세계 위인들의 사진이 걸려있으나 우리나라 인물은 아니 보여 서운했다. 거명하면 공자 채륜 로신 손중산 모택동 뉴턴 베토벤 다윈 퀴리부인 레닌 등이다.

 소학 초등 고등의 3개 학부가 함께 있는 이 학교의 재학생은 504명, 교직원이 73명이요 학급당 인원은 놀랍게도 19명이란다. 해마다 졸업생중 60~70%가 대학에 진학을 한다고 한다. 단동시의 유일한 대학기관은 3년제의 「단동사범대학」이며 최근 한국어과가 신설되었다고 한다.

 최교장의 이야기로는 최근 어려운 사안이 한둘이 아니란다. 첫째가 소학교를 부설할 계획인데 현재로도 교실이 부족하다는 점이요, 둘째가 교육경비의 부족이며 여기에다 시당국의 공원 확장계획으로 인해 학교를 철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한편 집안의 「태왕향조선족소학」은 광개토대왕릉 뒤편으로 담장을 경계하여 위치한다. 1982년 개교했다는 동교의 재학생은 1, 2, 4, 6학년의 4개 학년, 4개 학급에 50명이고 임성녀교장을 포함한 교직원 7명이다. 최근 한족 어린이들도 입학하는 등 차츰 학동이 증가하고 있으나 한때 산아제한과 이농 한족학교로의 전학 등으로 학생수가 줄어드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유치반과 학부형학교를 별도로 두고 있다.

 교장실을 겸한 직원실 한 모퉁이의 몹시 낡은 서가에는 우리 국내 출판사의 동화집 몇권과 중국 조선민족 출판사의 교과 참고서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현관의 생활안내판 내용이 흥미로웠다. 「좋은일」란에 운동장에서 돈을 주워 신고했다는 한 선행학생을 소개하고 「나쁜일」은 넥타이를 매지않은 복장불량을 지적한다. 그리고 「주의」란에는 바람부는 계절이므로 성냥장난을 말자는 주의문과 「알림」란에는 5월3일 소풍을 간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변방이라서 그럴까. 단동과 환인의 두 중학교에 비해 조건과 환경이 퍽 열악해 보여 안쓰러웠다.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은 근면하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것으로 이름나 있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했던 시절 남부여대 낯선 이국땅을 찾아온 이들은 나라와 고향을 잃은 울분과 타관에서의 천대속에 자식들만은 공부시켜 잘사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위안하자는게 오로지 소망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돈이 생기면 교실을 짓고 교사를 초빙했다. 농한기면 자원하여 학교를 짓는 일에 힘을 보탰다. 교사들은 겨우 연명이나 할 대우에도 기꺼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족 동포가 거주하는 지역에는 거의 학교가 있게 되었다. 조선족은 지금도 어디로든 이사할 때에는 반드시 세가지를 확인한다고 한다. 그 첫째가 식수가 어떤가이며 두번째는 교통문제, 세번째가 인근에 학교가 있는가이다. 그래서 맹모의 삼천지교는 중국의 고사이면서도 그것을 가장 잘 본받는 사람들이 조선족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현재 중국내의 소수민족을 포함한 민족별 교육열을 보면 조선족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번 중국여행중 몇사람의 조선족 동포를 만나 비록 이야기로 나마 그들의 생활상을 전해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소득중의 하나이다.

 ▶우선 우리 일행을 안내하며 도움을 준 홍여사이다. 줄곧 미스홍으로 불렸으나 학교에 다니는 딸을 두었다는 아직 20대의 기혼녀로 강원도 삼척출신 할아버지의 3세교포이다. 심양대학 경제학부를 나온 재원으로 최근 북한에도 다녀온 바 있으며 수년 전에는 취업차 내한, 경인지역의 식당가에서 일했으면서도 근로의 대가를 한푼도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피해동포의 한사람이다. 부군이 공직에 근무한다는 그녀는 뒤늦게 보람있는 직장을 만나 심양에 가족을 둔 채 단동에 와서 근면하게 일한다고 했다. 중국에는 그녀와 같은 한국인 안내역에 종사하는 지식여성 동포가 많다.

 한편 그녀에게는 10대의 몸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순국한 백부가 있었다고 한다. 국내 보훈당국에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을 하려 해도 뚜렷한 근거가 없다며 안타까워 했다. 지금도 부친은 문화혁명때 숨기느라 전전긍긍했던 국부군과 촬영한 백부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단동 거주가 아니나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압록강공원의 노점상 김여인(48)이다. 할아버지가 경상도에서 왔다는 김여인은 본계에 남편과 학교다니는 아들, 출가한 딸이 있다기에 갸우뚱했더니 단동에서 심양쪽으로 중간지점이라고 일러준다. 본계(本溪 번치)는 산간지대로 단동의 북방에서 감싸안고 있는 형국이며 우리가 지나갔던 환인도 본계에 속한다.

 김여인은 유람선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모조수정인듯 도장 몇개와 목걸이 메달이 담긴 작은 유리박스가 놓이고 그녀의 손에는 조잡한 북한의 지폐와 우표가 들려 있었다. 장사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런대로 밥은 먹을 수 있으며 토·일요일은 바쁘다고 했다.

 ▶학교를 졸업한후 호텔 복무원이 된 집안의 18세 소녀 최양이다. 약간 죽은깨가 보이는 둥근 얼굴에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그녀는 복도를 지날 때마다 생글생글 웃어주었다.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라는 약간의 먹거리는 부끄러운듯 받았으나 같은 동포로서 주는 정표라는데도 팁은 고집스럽게 물렸다. 그런것은 모르며 다만 고국의 손님들이 자신의 복무처에 묵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우월감이라도 생겼던지 우리말을 가르쳐 주며 깔깔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니 하오』 『감사합니다=셰 셰』

 ▶집안시내의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택시 대용의 릭샤 운전사들이다. 아침 산책길에 허름한 차림의, 그러나 고향의 선량한 아우와도 같은 한 중년이 서울서 왔느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농촌에서 옮겨와 릭샤 영업을 하는데 농사보다는 좋은편이라고 했다. 릭샤 한대값은 중국돈으로 2천∼3천원-그것으로 한달 천원은 벌 수 있다고 하는 그는 할아버지가 울산에서 이주해 왔다며 지금도 그곳에는 육촌 형제들이 살고 있단다. 또한 한국에 나가 돈을 벌어 집 세 채를 마련했다는 장군총에서 만난 또다른 운전자는 여유가 만만한듯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그들은 일행이 집안을 떠나는 새벽 우정 호텔앞에 나와 못내 서운해하는듯 했다.

 이외에도 직접 만나 본 조선족 동포는 또 있다. 집안 태왕릉에서의 두노인-그들은 조심스럽게 헌다식을 지켜 보면서 자기들이 할일을 고국의 동포들이 와서 대신 해준다며 미안스러워 했다. 그분들 외에 곧 식당을 개업한다며 수풍댐을 안내한 40대 장년 환인의 중학교 문전에서 노점을 벌이던 아낙 그리고 동항의 김밥장수 아주머니 등이 있다. 이들은 돌아오는 동방명주호의 갑판에서 내려다 보이는 잔잔한 해면에 자꾸만 떠올라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들 모두는 황량한 벌판에서 자신의 인생길의 여정을 헤쳐가는 개척자들이다. 멀리서 나마 진심으로 그들의 성공과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