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경호 경기본사 제2사회부장
오산시 세교택지개발지구 철거민 농성현장이 관심을 끌고 있다.
애꿎은 이들의 잇따른 죽음과 부상, ‘주거권 쟁취’를 둘러싼 처절한 싸움이 벌써 40여 일 동안 계속되고 있어서다.
‘농성현장’은 이 시대 공권력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하나는 아무나 법원의 최종 판결 전까지 무죄로 추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인권의 무게는 결코 ‘작전의 성공’은 앞설 수 없다는 점이다.
겨우 이십여 명을 헤아리는 연립주택 안의 농성자들은 이미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로부터 범법자들로 낙인찍혀 있는 상태다. 그들과 철조망 밖의 세상은 경찰에 의해 철저히 단절돼버렸다.
그들은 이미 범죄자이기에 전기와 수돗물도 공급받을 수 없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생수 몇 통과 쌀 몇 줌만이 경찰의 허가를 받아 반입될 수 있을 뿐이다.
경찰의 이러한 고사작전은 비교적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40여 일 지속된 진 빼기 작전으로 농성주민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돼 있는 상태다. 인권위의 중재로 이들을 진료한 의사들은 이들 주민들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파괴돼 가고 있다고 전한다.
이들을 더욱 괴롭히고 있는 것은 ‘범법자‘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다는 공권력의 천박한 의식이다.
몇몇 경찰들은 이들의 농성장소를 향해 골프공을 날렸는가 하면, 밤이면 철제로 만든 망루를 향해 대형 새총을 쏘아 수면을 방해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제약한 데 이어 수면까지 철저히 방해함으로써 ‘작전의 성공적 수행’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모양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같은 행태가 외부와 고립된 겨우 몇십 명의 농성주민들을 상대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중년의 여성까지 끼어 있는 이십여 명의 주민에 비해 청장년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권력의 규모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불·탈법적 방법을 동원해 비겁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결국 ‘작전의 성공적’ 수행을 앞당기기보다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자충수를 두고 만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진을 빼가며 대치하기를 40여 일. 그 사이에 젊은 용역직원 한 명이 목숨을 잃고, 경찰과 주민 여럿이 부상을 당했다.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데에는 농성 현장 주변의 사람 누구도 사태를 풀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농성주민의 보급을 통제하고 물리적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뿐이다.
정작 문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당사자들은 뒷짐을 진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협상이나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원칙만을 고수한 채, 사태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권한을 쥔 자들이 뒷전으로 물러앉은 상황에서 애꿎은 이들만 희생당하는 꼴이다. 용역직원의 죽음과 경찰의 부상과 징계, 농성 주민들의 고통이 그렇다.
권력은 그 크기에 비례하는 만큼의 책임이 따를 때 정당성이 확보된다. 이번 사태는 소수의 농성주민을 향해 공권력의 총체적인 공세가 퍼부어졌다는 점에서 권력의 야비함을 보여줬다.
그 과정에서 문제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자들은 뒷전으로 빠진 채 애꿎은 이들의 희생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비겁함을 드러냈다.
주공과 경찰 측은 농성주민들의 요구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대로 농성주민들이 정당성을 잃었다면, 그에 대한 대응은 더욱 바르고 당당해야 한다.
겨우 20여 명의 농성주민을 상대로 거대한 공권력이 비겁하고 야비하게 대응한다면 여론은 결국 소수의 약자 쪽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blog.itimes.co.kr/kei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