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가 설치 운영된지 10년 째가 되는, 의미 있는 해다. 또한 올해 학운위는 교육감 선거권를 5년만에 ‘반납’하면서 뼈아픈 반성으로 지난 10년을 반추해야 하는 해다.
학운위는 1995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가 오랜 진통 끝에 발표한 5.31 교육개혁안에 포함돼 ‘교육개혁의 꽃’이라는 찬사와 함께 출범했다. 폐쇄적인 학교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었다. 2000년부터 학운위에는 위원 전원에게 교육감을 선출하는 투표권이 부여됐다. 학부모, 교사, 지역인사들이 함께 교육감을 선출한다는 사실은 후보자 없이 교육위원들간 교황 선출방식으로 치러진 이전의 제도에 비해, 당시로선 꽤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시·도별로 시행된 학운위원들의 교육감 선거 결과는 낙제점이었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할 백년대계의 ‘교육’도 학운위의 간접선거를 통해 참담하리 만큼 부패와 비리, 담합으로 얼룩진 혼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결과 정치권이 이번에 학운위원들의 투표권을 거둬들이는데, 사사건건 대립하던 여·야 정치인도 망설이지 않고 있다. 임기가 얼마 안남아 올해 학운위 간선으로 치러야할 교육감 선거마저도 내년 직선제까지 미루고 그때까지 대행체제로 가자는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까지 제출되는, 교육계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오는 6월로 예정돼 있는 인천시교육감 선거와 관련해서도, 학기초 학운위원 선출에서 부터 투표권 확보를 위해 여전히 비교육적인, 부당한 방식이 동원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실 앞에서 직선제의 당위성은 학교현장에서부터 스스로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학운위 제도의 도입과 그 10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사람의 문제, 학운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의지의 문제로 요약된다. 제도는 나무랄 데 없는데 문제가 발생하고,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정작 학교현장의 변화는 별로 이뤄내지 못해 온 것이다.
학운위의 근본적인 문제는 첫 단추를 끼는데 있다. 학기초에 구성되는 운영위원들의 구성이다. 그것은 곧 자발성과 대표성의 문제다.
10년전 교육개혁위원회가 학운위의 출범을 알렸을 때 그 앞에는 ‘학부모, 학교 관련인사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학운위에 참여할 학부모가 부족해 학교장이 암암리에 추천해 구성된다면, 이해관계자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지역위원 등의 몫으로 참여한다면 학운위가 추구하는 본래의 목적, 교육개혁의 선봉으로 ‘수요자 중심의, 단위학교의 민주적 교육자치’는 달성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학운위의 문제는 최종적으로 학부모 위원들의 대표성의 문제로 압축된다. 학부모위원의 선출 때 아버지를 포함한 학부모들의 참석률과 이를 높이려는 노력은 여전히 저조하며 제도의 개선도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참여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운영위원의 선출만이 성공적인 학운위의 운영에 기초를 쌓는 것이다. 학부모회와 교무회의의 활성화는 이런 면에서 학교운영위원회를 건강하게 받쳐줄 수 있는 기반이다.
학운위 제도가 지난 10년간 현장에 정착하면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학교 예산, 행사등 투명성이 제고됐으며 서서히 학교민주화의 틀로 자리를 매겨가고 있다. 혼자나 소수의 결정보다 학교 구성원을 대표하는 학운위의 다수 인사들과 함께 심의하고 결정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하는 학교장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제 학교장은 학운위를 학교단위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며, 학부모들은 학운위의 취지를 깊이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학운위 운영위원으로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