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보상받을수 없는 억울한 세월이었죠. 무엇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끌려간것이 전쟁터 였어요. 천신만고끝에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않은 악몽같은 날들이었어요.”
일제 강제동원 피해신고 접수 첫날인 1일 인천 강화군에 처음으로 피해신고서를 접수시킨 고승창(83)옹. 1941년 4월 고향인 강화군에서 징병돼 남양군도로 끌려갔다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와 포로수용소에서의 ‘한많은’ 과거를 신청서에 담았다.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1941년 지금의 송해면 신당리 양조장에서 일하던 20세 청년은 면사무소의 노무자를 뽑는다는 징집통보에 따라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인천에서 기차를 탔다. 이 기차가 ‘지옥같은 5년의 세월’로 안내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산까지 가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전국에서 징집된 3천여 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태어나서 처음보는 큰 여객선을 타고 남양군도내 사이반도, 도라꾸도반도를 거쳐 일본군 비행대대 본부가 있는루오토섬에 도착했다.
여일본군 군속으로 징집당해 2년여 동안을 방공호, 막사공사, 비행기 활주로공사, 도로공사 등 일본군의 전쟁 뒤치닥거리를 도맡아하는 노예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다. 사람취급 않는 일본군 지시에 따라 더위와 굶주림, 지옥같은 생활이 계속됐고 더구나 살수있다는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은 더 힘든 날들이었다.
“당시 강화에서만 40명이 끌려 갔죠. 그러나 대부분 다 죽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4명뿐 이었어요.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죽은 혼을 달랜다는 진자리굿을 벌이는 등 죽은 자식으로 알고 있었죠.”
44년 남양군도 내에 있는 일본군 부대가 미군에 의해 대부분 함락되면서 그는 오른쪽다리에 총탄과 파편을 맞은채 포로로 잡혀 하와이로 이송, 치료를 받은후 포로수용소에서 1년을 지내야 했다.
결국 강제징용으로 끌려간지 5년여 만인 45년 말, 일본이 패망하고서야 고향에 돌아올수 있었다.
‘조센진 황군’으로 징병돼 살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조차 포기한 채 지낸 악몽 같았던 억울한 세월을 60여 년동안 가슴에 담고 살아온 그.
지금은 뒤늦게 얻은 외아들 병준(38)씨 내외와 손주들과 단란하게 살고 있는 고 할아버지는 늦게나마 정부에서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어 만져 준다는 사실이 못내 흐믓하다. /왕수봉기자 blog.itimes.co.kr/sbking
일제 강제동원 피해신고 접수 첫날인 1일 인천 강화군에 처음으로 피해신고서를 접수시킨 고승창(83)옹. 1941년 4월 고향인 강화군에서 징병돼 남양군도로 끌려갔다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와 포로수용소에서의 ‘한많은’ 과거를 신청서에 담았다.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1941년 지금의 송해면 신당리 양조장에서 일하던 20세 청년은 면사무소의 노무자를 뽑는다는 징집통보에 따라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인천에서 기차를 탔다. 이 기차가 ‘지옥같은 5년의 세월’로 안내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산까지 가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전국에서 징집된 3천여 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태어나서 처음보는 큰 여객선을 타고 남양군도내 사이반도, 도라꾸도반도를 거쳐 일본군 비행대대 본부가 있는루오토섬에 도착했다.
여일본군 군속으로 징집당해 2년여 동안을 방공호, 막사공사, 비행기 활주로공사, 도로공사 등 일본군의 전쟁 뒤치닥거리를 도맡아하는 노예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다. 사람취급 않는 일본군 지시에 따라 더위와 굶주림, 지옥같은 생활이 계속됐고 더구나 살수있다는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은 더 힘든 날들이었다.
“당시 강화에서만 40명이 끌려 갔죠. 그러나 대부분 다 죽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4명뿐 이었어요.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죽은 혼을 달랜다는 진자리굿을 벌이는 등 죽은 자식으로 알고 있었죠.”
44년 남양군도 내에 있는 일본군 부대가 미군에 의해 대부분 함락되면서 그는 오른쪽다리에 총탄과 파편을 맞은채 포로로 잡혀 하와이로 이송, 치료를 받은후 포로수용소에서 1년을 지내야 했다.
결국 강제징용으로 끌려간지 5년여 만인 45년 말, 일본이 패망하고서야 고향에 돌아올수 있었다.
‘조센진 황군’으로 징병돼 살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조차 포기한 채 지낸 악몽 같았던 억울한 세월을 60여 년동안 가슴에 담고 살아온 그.
지금은 뒤늦게 얻은 외아들 병준(38)씨 내외와 손주들과 단란하게 살고 있는 고 할아버지는 늦게나마 정부에서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어 만져 준다는 사실이 못내 흐믓하다. /왕수봉기자 blog.itimes.co.kr/sb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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