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인천의 미래를 보다 -연평도, 여전히 절망 속

"환경단체, 시민단체, 정치인, 기자가 이제 여기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뭐가 있다고. 혹시 선거철이라 온 것 아니야?"
"그래도 인천에서 어렵게 우리를 찾아왔는데, 우리의 어려움을 이 분들한테라도 알려야 할 것 아냐"
5월13일 오후 7시30분쯤 소연평도 마을회관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인천의제21·인천녹색연합 주최로 마련된 소연평도 주민간담회에 참석하라는 이장과 주민들 사이에서 참석 여부를 두고 고성이 오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주민 10여명이 마을회관에 모였다. 인천녹색연합에서 이번 지방선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해명도 있었다.
간담회가 시작되자 마자 처음과 다르게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작은 희망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같은 마을 주민들의 외부인에 대한 불신은 대연평도도 다르지 않았다. 연평면 주민들은 매년 외부 기관에 어려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었다. 연평면 어민들은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으로 어업을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해변에 흉물스럽게 자리한 용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봉화산을 돌려다오

'흉물스럽게 방치된 봉화산', '매년 폭풍으로 무너지는 제방과 마을입구', '티탄철 먼지와 먹을 물이 부족한 마을'.
매년 소연평도 주민들을 도와주겠다고 외부에서 누군가는 찾았다.
지난 2004년 8월 인천 각계 각층이 참여한 '인천앞바다바로알기'팀이 이 곳을 찾았을 때도 같은 민원이었다. 5년이 넘게 흘렀지만 주민들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피폐해 지고 있었다. 소연평도는 면적이 0.26㎢로 걸어서 섬 전체를 반나절 정도면 돌 수 있는 작은 섬이다.
5년전 44가구가 이 곳에 살았지만, 최근에는 5가구 정도가 늘었다. 소연평도는 하나의 산으로 이뤄진 곳이다. 214m짜리 봉화산을 중심으로 해변과 맞 닿은 능선에 유일한 마을이 있다. 봉화산은 마을 주민들이 신성시한 마을 수호신이었다.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둥근 구름띠가 봉화산 주변을 감싸는 신비로운 현상이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산은 또 급경사의 해안 절벽과 구릉이 절묘하게 어우려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갑자기 정권의 지원으로 봉화산 광산 개발이 시작되자, 산이 절단나 버렸다. 광산 개발이 진행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주민들은 봉화산 광산 개발 반대 운동에 나섰고, 결국 마을주민 20여명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광업권 허가를 받은 동원탄좌라는 광산업체는 1986년~2001년 연간 30~40만t의 티탄철 원석을 봉화산에서 채취해 일본에 수출했다. 이 업체는 봉화산 개발 명목으로 연간 1천200만원을 마을기금으로 내놓으며 생색을 냈다. 하지만 봉화산은 20m 이상 정상이 가라앉았으며, 현재까지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고 있다. 이에 바람이 불때면 돌, 철가루가 마을과 해안을 덮치고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은 이런 봉화산을 더 이상 신성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티탄철 가루가 날리며 해양을 오염시키는 오염원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봉화산 광산개발은 오석해안 등 바다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티탄철 가루가 오석해안으로 밀려오면서 바위 등에 붙어 굴 서식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3천t급 광석 운반선이 20여년전 오석해안 앞바다에 좌초되면서 큰 환경재앙을 초래했다. 좌초된 배에서 나온 기름이 오석해안 앞바다를 새까맣게 덮어버린 것이다. 이때 홍합, 굴 등이 모두 폐사했고, 어찌된 영문인지 이때부터 굴과 바지락, 홍합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 때 기름 유출 사고로 마을 주민들이 받은 보상은 가구당 고작 110만원 이었다.
소연평도 한복녀(64)씨는 "20년 전만해도 굴이 바다에 천지였는데, 이제는 굴, 홍합을 먹으려면 오히려 육지로 나가야 돼, 어쩌다 우리 섬이 이렇게 됐는지 몰라. 봉화산에서 날리는 먼지때문인지, 아니면 기름 유출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 옛날 봉화산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라며 아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기와 꽃게 그리고 미래

연평도는 1960년대 후반까지 국내 최대 조기 황금 어장이었다.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들이 서해를 끼고 북으로 올라와 경기만과 해주만 일대에서 산란을 했기 때문에 전국의 어선들은 5월이 되면 연평도로 몰려들었다. 이 당시 조기 파시(波市)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연평도 어민들의 자랑거리다. 현재 조기 크기가 10㎝ 정도지만, 이 당시 조기는 무려 20㎝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평도 등대공원 옆에 자리한 조기박물관에는 그 영광의 기억이 있다.
조기 파시 황금어장이 1970년대 부터는 꽃게어장으로 변했다. 조기가 사라지고 꽃게가 연평도를 찾은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국내 해양학자들은 황해도 연안과 바깥수역이 만나는 전선수역의 조건, 수심이 얕고 바닥이 모래질이어서 조기가 산란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란 추측뿐이다. 하지만 꽃게의 영광도 이제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연평도 어민들은 조기잡이로 돈을 벌지 못해 배를 팔고 있다.
연평도 소속 꽃게잡이 배는 65척이다. 이 중 원주민이 소유한 배는 고작 17척에 불과하다. 2005~2007년까지 꽃게 생산량이 확 줄어들면서 눈덩이처럼 늘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배를 외지 선박회사에 팔아버린 것이다. 2008년 이 일대 꽃게 생산량 228만7천313㎏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어획량이 늘고 있지만, 언제 또 꽃게가 없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올해도 4월 어획량이 4만62㎏으로 예년 같은 기간 2배의 어획량을 기록했지만, 5월 들어 다시 꽃게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여기에 매년 수 백척씩 연평어장을 넘보는 중국 어선 때문에 꽃게잡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평도 주민들은 조기에서 꽃게로 이어지는 영광 그리고 새로운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황금 바다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 과거부터 연평도에 내려오는 뱃노래 '배치기 소리' 중 한 대목이다.
이 배치기 소리를 다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영광을 찾아, 주민들이 뱃머리를 돌릴 채비를 하고 있다. 바다와 자연이 준 선물을 받아오며, 한 시대를 풍족하게 살았던 연평도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바다의 선물'이 아니라 '바다, 자연' 그 자체 일 것이다. /연평도=노형래기자 blog.itimes.co.kr/trueye

*4편에서는 '연평도, 자연에서 희망을 품다'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