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열(金在烈ㆍ53) 교수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먼저 그가 한국산업디자인의 현장에서 해온 선구적 행적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홍익 미대 건축 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1년 당시 우리의 취약한 산업기반 하에서 디자인에 대한 경영자측의 인식부족을 극복하며 한국 가구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을 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가 70년대 초 (주)보루네오 가구에서 디자인한 「CX 시리즈」는 그 모던한 스타일과 간결미로 인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도 모던 디자인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산학을 연계한 산업디자인 발전 프로젝트를 제시하여 학계에서 이룬 가구디자인의 과학적이고도 기능성, 심미성이 갖추어져 있는 연구업적을 받아들이고 학생들을 위하여 현장체험 실습기회를 주거나 신제품 개발방향 등을 학계에 제공함으로써 산학의 유대를 강화하여 한국 가구 디자인을 경쟁력있는 그것으로 발전시킨다. 또한 각종 산업디자인 공모전이나 세미나 등을 주도하여 한국 산업디자인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인재를 발굴하여 현장에 투입하는 등 대기업의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로서 그의 한계내에 있는 가능한한 모든 역량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월간 디자인」 1995년 6월호에는 「한국의 대기업 디자인 경영자 8인」 기획기사가 있어 눈에 띈다. 물론 이때만 해도 디자이너 출신으로 대기업의 경영자가 되었다는 것이 센세이셔널한 일이었고 (그는 1989년에 (주)보루네오 가구 상무로 취임) 이미 1989년, 1990년 연이어 한국 인테리어 디자이너 협회 상을 수상했으며 그 협회 이사를 맡음으로써 한국 산업디자인계 현장에서 중추로 발돋움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경영진이 되고부터는 후배 디자이너의 작품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또한 이를 타부문 경영진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하고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디자인 감각과 능력만을 과신하지 말고 이를 윗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문제 해결능력 역시 키워가기 바란다. 산업 디자이너의 역할은 예술과 엔지니어, 상업성을 포함한 종합적인 예술임을 항상 명심해주기 바란다.』

 이러한 김재열이 90년대에 이르자 수채화가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아니 변신이라기 보다는 「회귀(回歸)」의 성격이 더 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창시절(대구 공고) 김재열은 저명한 수채화가인 이경희 선생에게 사사한 바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대구는 근대 한국 수채화와 연관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서동진 서진달 이인성 이경희 등이 포진하고 있어 수채화의 폭과 깊이가 굳건한 지역이다.

 방과후 미술실에 남아 이경희 선생에게 지도받는 시간은 화가로서의 꿈을 구체화시켜가는 도정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장 흥분되면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순수미술을 향한 그의 집념을 관철시키기에는 그 당시 경제여건으로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홍익미대 건축 미술학과에 진학한 그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의장조형 쪽으로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미술에 대한 그의 집착력을 보여주고 있다.

 학군 사관(ROTC)으로 임관하여 수색대 부중대장으로 야전에 투입되었을 때도 그는 행랑안에 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며 사생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전역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스케치북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다. 해외출장 중의 공항 벤치, 이국땅의 열차안, 거리의 풍물들, 낯선 사람들의 숨소리 속에서도 틈틈이 스케치 북을 열었다. 일례로 그는 작년 필자와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려대는 그의 작가적 기질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다. 이런 열정에 힘입어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인천미술대전(대상), 한국수채화협회 공모전(우수상) 등 공모전에서 연이어 수상함으로써 늦깎이로서의 한계를 불식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아울러 그는 「세계 현대수채화 작가전」(1991) 「한ㆍ일 교류전」(1997) 「신세계 갤러리 초대 수채화 6인전」 「한ㆍ중 교류전」 「인천시 초대 추천작가전」 등에 초대 출품함으로써 수채화가로서 그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관조한 것에서부터 사라져가는 풍물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리고 폐선이나 폐어망 등 자칫 사람 눈에 거슬릴 것 같은 단상들을 고도의 수채화적 표현기법으로 재현해낸 자연주의적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러한 그림들의 저변에는 주변과 일상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이 담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황량한 갯벌에 명을 다하여 방치된 폐선의 모습은 그 배가 겪은 풍상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여기저기 멍들고 갈라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지만 흉물스럽다기 보다는 마치 빛바랜 유물을 보는 것 같이 가련하다. 이 배와 같이 인고의 세월을 겪어 왔을 선주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배와 같이 명을 다 했을까 아니면 신식엔진이 달린 철선을 장만하여 아직도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까. 이렇게 하릴없고도 여유로운 상상을 유도하는 것이 그의 수채화인 것이다.

 인천 시민이 된 지 30년 가까이 되는 그는 늘 소래에 찾아가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린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온 몸을 드러낸 소래의 갯벌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편안한 친구와의 만남같이 남다른 곳이다. 늘 소박함과 진지함이, 생동감과 즐거운 표정들이 넘쳐 나는 곳.

 지난 시간들을 뒤로 한 채 닻을 내린 폐선들까지 늘 그 속엔 풋풋한 인간미가 있다. 내가 소래 포구를 찾는 것은 바로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들이 일깨워 주는 내 어린시절 그림에 대한 열정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 이다. 그 시절 고향의 야산 밑 황톳길 밭이랑엔 수박 넝쿨이 풍성했었고, 겨울이 오면 세상 모두를 덮었던 흰 눈이 교회 종탑까지 하얗게 그림을 그려 놓았었다. 여름엔 조각 낸 수박을, 겨울엔 교회 종탑을 그리고, 오리고 붙여 카드도 만들었던 기억 속엔 새삼 구호물자에 섞여 오던 호화롭던 외국산 카드까지 생등맞게 떠오른다.』

 현재 홍익 미대 목공예과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는 김재열씨 가족은 부인(정연희ㆍ서예가), 세자녀 모두가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미술가족이기도 하다. 〈이경모ㆍ미술평론가〉 1947 경북 의성생

 1969 홍익미대 건축미술학과 졸업

 1973 모던 가구 「CX시리즈」개발

 1989 한국 인테리어디자인 협회장상 수상

 1990 인천미술대전 특선

 1991 인천미술대전 대상

 1993 한국수채화협회 공모전 우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구상 부문 입선

 1995 한국목재 공학회 기술상

 1997 인천현대미술 초대전

  한ㆍ일 교류전

 1998 제12회 대학생 목재가

 1999 신세계갤러리 초대 중국스케치전

 현재 홍익대학 미술대학 목조형학과 겸임교수, 한국미술협회 회원, 홍림회 회원, 한국 실내건축가협회 회원, 인천 사생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