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언제나 강대국간의 전쟁에 피할 수 없는 것이 약소국의 피해이다. 세계2차대전의 개전때 폴란드나 발트삼국 등이 그러했다. 폴란드를 분할한 독일과 소련은 관계가 긴밀해지는듯 했으나 한편으로는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소련은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즉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히틀러가 다음 목표로 자신을 지목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었다.

 소련이 취한 첫 대응은 우선 방위선을 되도록 앞으로 전진시키는 일이었다. 발트삼국에 최후통첩 정부를 개조하고 그 영토를 점령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그리고는 40년 8월 소련은 세나라를 병합하고 말았다. 리투아니아 3일, 라트비아 5일, 에스토니아 6일등 일사천리였다.

 발트삼국은 발트해에 연한 전기 세나라의 총칭이다. 그리고 발트해란 북유럽의 한 바다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에 의해 북해와 분리되어 있는 내해이다. 전통적으로 대해로의 출구를 주목하는 소련은 이 바다를 중요시했다. 비록 러일전쟁때 멀리 대한해협에서 전멸했지만 발트해에 근거를 둔 발틱함대는 제정 러시아의 주력함대였다.

 작은 나라들-그리고 서로 이웃하고 있을 망정 이들 세나라는 민족 언어면에서 서로 다르다. 에스토니아인은 우랄계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슬라브계이다. 이들 나라는 예로부터 강대국의 지배하에 들기를 반복 18세기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독립의 의지는 강했다. 1918년 각각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으나 2차대전때 또다시 소련에 점령되는 비분을 안아야 했다. 소련의 공화국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소련연방의 해체때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91년 수교를 맺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항과 인천항이 결연하리라 한다. 이를 위해 20일 북경주재 보베리스 대사가 내인한다. 클라이페다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로 유럽 각지와 교통망이 연결되고 전자 금속공업이 발달해 있단다. 말로만 듣던 먼 발트해가 우리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