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단체와 후원자
2004년 11월5월 금요일. 저녁 어스름 무렵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때늦은 가을비가 순식간 거리를 물의 도시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시각 인천 송림동의 한 소극장에서는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지역문화·예술계 얼굴이 알려진 인사에서부터 시의원, 단체장도 눈에 띠었지만 관객으로 이름지워지는 소시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인천 극단 ‘십년후’의 창단‘십년’을 축하하는, 축하해주는 자리다. 사진작가가 준비한 ‘멀티 슬라이드쇼’와 풍물단의 원정 무대에 이어 이날 자리는 그간 극단이 올려온 연극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되짚어보고 마음을 나누는 ‘소박함’으로 채워졌다.
중앙 연극판에서 볼때 창단 몇년을 기념하는 자축 파티란 별반 새로울 것도 없다. 그 흔한 일이 인천 연극계에 대입할 경우 기억으로 잡히지 않는다.
십년후에 대한 지역내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창단 4년(1998)을 넘어서면서 훈할머니 이야기를 다룬 ‘데이신따이’로 전국 연국제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 매년 두차례씩 꼬박 어린이 영어연극을 올려 이름을 더하더니, 어느 해인가 민간 극단으로는 처음으로 자발적인 후원회가 결성, 세간에 회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2년전 올린 가족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은 작품의 완성도에서는 물론, 관객동원에서도 성과를 거두면서 명실상부한 극단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초연 당시 닷새 공연에 관객 1만여명 동원, 인천 극단 최초로 서울 초청 장기공연, 대학로 입성, 김천시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초청 무대, 그리고 지난 달 고양 덕양어울림극장 개관기념 공연까지. 해서, 장장 100여회 릴레이 공연기록을 세웠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들 중심에는 극단을 만든 최원영씨가 있다. 다른 극단 대표들과 달리 그는 연극인이 아니었다. “‘죽도록 공부만 했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살 길을 찾았다. 내가 서있는 곳만이라도 사회를 올바로 살아가는 이들(나의 언어로 ‘바보’라 일컫는데)이 모인 천국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이에 대한 실천이 극단 창단이다.” 8, 9년전 취재차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해맑은 얼굴로 건넨 말이 생생하다. 이후 그의 주위에는 연극을 매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느새 가족이 됐고 천국을 위해 기약하던 십년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면 명성과 정확히 반비례 곡선을 그리고 있다. 공연을 올리는 수만큼 아이러니하게도 빈곤은 깊어진다.
‘삼신할머니…’를 선보일 당시 순수 제작비는 1억8천여만원. 인천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의욕에 맞추다보니 자금이 수월찮게 들었다. 인천시 무대예술지원기금(3천5백여만원)이 밑바침되긴 했지만 지방의 극단들이 다 그러하듯 종자돈을 차고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빚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뻔한 이치다. 초기 관객의 높은 호응도가 자금사정을 풀어주는 듯 했으나, 작품에 반해 오라는 요청을 마다않고 열심히 내달은 2년뒤 결과는 ‘궁핍’이었다.
극단 십년후에 개인적인 감정까지 엎어 시시콜콜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는 이렇다. 이들의 모습이 인천 문화의 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듯해서다. 인천시가 동북아 대표도시를 표방하며 외형을 증폭시키기 위해 줄기차게 달려온 세월이 10여년이다. 국책사업과 맞물린 대형 건설사업에 매달려온 정책 입안자들에게 문화사업이란 잠들기전 하루를 반성하며 ‘너무도 소홀함’으로 잠깐 떠올리는 항목에 불과할 뿐이다. 도시 인천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중 문화는 말그대로 외인지대와 닮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올 여름 ‘인천의제 21’ 발의로 ‘인천메세나협의회 구성을 위한 토론회’가 개최, 드디어 기업 메세나 운동 필연성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문화·예술계로서는 참으로 반길 일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불씨가 지펴지는 단계이고 보면, 희망을 있되 갈길은 멀다.
관(官)이 전폭적인 문화 후원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기업이 제1의 후원자로 우뚝 서기까지 그 간극을 메우는데 이 도시의 행정 집행부가 선봉에 서야 한다. 지금은 그 역할이 많이 필요한 때다. 십년후의 다음 자축파티에서는 소시민과 더불어 이들이 후원자로 자리해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