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겨레 통일염원의 상징으로 영봉 백두산을 꼽는다면 강으로는 단연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며 우리의 심성과 사고가 시작되는 은혜와 근원의 강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서 향수같은 것을 느낀다.

 압록강은 우리나라 최장의 강으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평안북도 신의주의 외항 용암포에서 황해로 흘러 든다. 몽매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땅 혜산 중강진 만포 위원 초산 벽동 청수 신의주를 거치는 동안 길이가 장장 900㎞가 넘는다고 한다. 그것을 거슬러 이번에 절반인 만포진의 대안 집안현까지를 물길이 아닌 육로로 올라갔다. 하구에서 만포진까지는 450㎞-그러니까 우리 리수로 천백리가 넘는다. 그러나 우리땅이 아닌 거칠고 황량한 벌판의 중국땅을 통해서이다. 인천일보사와 가천문화재단의 「고구려 유적답사」라는 조금은 거창한 여행단의 일원으로서였다.

 압록강은 우리 국토에도 허천강 독로강 위원강 등 지류를 많이 거느리고 있지만 중국쪽에도 훈장(渾江) 아이허(애하 촪河)등 크고 작은 강들이 여럿이다. 특히 훈강은 우리 고구려의 발상지요 성쇄를 함께 한 젖줄의 강이다.

 필자가 중국여행의 세번째인 고구려유적 답사길에 오른 것은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항에서의 선박편으로 이다. 그 첫번째가 홍콩을 통한 공로요 두번째가 인천에서의 해로였으니 세번째 만큼은 통일의 북한땅을 밟아가는 육로였으면 한 바람이 허사가 되었지만 외국여행, 특히 고구려 유적을 찾아 간다는 흥분은 가실 수가 없었다.

 저녁 5시의 출항 예정이 컨테이너 화물 적재 때문이었는지 한시간여나 지연, 독 갑문을 빠져 나가는 데도 또 한시간이 소요되었다. 갑문의 통과가 지루한 승객들의 눈치이길래 내항과 해면의 수위차를 조절하면서 갑문을 여닫고 통과하는 이치를 설명해 주니까 수긍하면서 신기하게 여기는 표정들이었다. 외항을 벗어나 낯익은 인천 앞바다의 섬들을 스칠 때는 이미 긴긴 봄날의 하루해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내 식당에서의 식사시간은 7시부터 한시간-식사를 마친 승객들이 이곳저곳을 살펴보느라 잠시 혼잡했다. 승객들은 이미 인천항 국제 터미널에서부터 화물로 극심한 혼잡을 이룬, 그러나 애국자로 불리는 소위 보따리 장사꾼에다 고향을 찾아가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북오도 출신의 실향민들로서 비록 강건너 대안에서나마 죽기전에 한번 고향 산천을 바라보기라도 하고 오자는 일념으로 배를 탄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라는 명패를 가슴에 단 그들은 대개 3박4일의 일정으로 배에 오른다. 배에서 가고 오며 이틀밤을 소요하니 현지에서는 겨우 하루 동안이다. 도착지 단동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은 비교적 깨끗한 3성급의 23층짜리 국제주루(國際酒樓)이다. 단동시내에서 가장 양호한 호텔이라고 한다.

 그들은 호텔의 서남쪽 객창으로도 쉽게 보이는 압록강 철교를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고향길로 달려가듯 강가의 유람선에 실려 다가간다. 끊어진 철교 밑으로 해서 위화도 앞까지 올라갔다가 썰렁한 신의주 시가 바로 코앞까지 간다. 옛 조선소 자리는 비어 레일과 계단이 드러나고 부두에도 화물이 없어 보인다. 몇 개 안되는 굴뚝에서도 연기가 아니 오른다. 공원이라는 곳의 회전그네는 「돌지않는 풍차」의 신세-정체와 고요뿐이다. 다만 개나리만 노랗게 피어 동토일 망정 자연의 봄을 알린다.

 뱃전에 매달린 실향민들은 행여라도 무엇을 발견할세라 혹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더러 강가에 나온 주민들을 향해 "안녕하세요"만 연신 외치다 안타깝게 돌아선다. 그리고는 실의를 가득 안고 다시 서둘러 인천행 배에 올라야 한다. 그러니 마음이 편할리 없다. 아니 다녀감만 같지 못하다. 70∼80대의 노인들이라 돌아가는 선실에서의 밤이 심신으로 괴롭다. 그중에는 거의 탈진하다시피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도 있다. 젊어서 떠난 고향땅을 밟아보지는 못할 망정 소식이라도 듣던지 아니면 활기라도 차 있어야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강건너의 우리땅을 남의 나라에서 건너다 보는 고향땅과 관계가 없는 처지로도 착잡한데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야 몇번이고 속으로 통곡이라도 했을 것이다. 단동과 신의주의 형편이 예전에는 정반대였으나 오늘날엔 뒤바뀌어 단동이 오히려 활기차고 밤거리가 휘황찬란하고 신의주 쪽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며 그들은 푸념한다. 오늘날 단동이 우리와의 교류이후 활성화된 것을 생각하면 통분한 마음 한편으로 속히 우리의 경제력이 북녘 땅에도 미쳐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일행중에는 고향의 아우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고 돌아가는 노인이 있었다. 전쟁전 의주군 수진면의 면장을 지내다 월남했다는 75세난 한 노인은 연락인을 통해 아우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와 친척들의 사진을 받았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한편 선박운항의 절대적 공로자라 할 보따리장수들은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어찌보면 그들은 우리의 작은 애국자들이다. 힘에 부치는 무게의 우리 상품을 지니고 중국에 제집 드나들듯 한다. 그것도 한두번에 그치지 않고 매항차마다 배에 올라 열악하고 고달픈 여행을 한다. 더러는 2인실 선실을 전세내듯 독점, 그 안에 살림을 차리다시피 호화로운 행상을 하는 여인도 있지만 20여명씩 합숙하는 저급 선실에서 잠을 자며 선내 식당에도 못들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뿐만아니라 현지인들과의 거래에서 사기나 일방적인 해약을 당하는 억울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무작정 밀수나 영세한 봇짐장수정도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당국의 제도적 차원에서 대책이 뒷받침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부지런한 그들로 인해 중국의 구석구석 두메산골까지 우리 물건이 들어간다. 집안현에서 목격한 일단의 현지인들 복장이 모두 남대문 시장에서 나온 것이리라 짐작이 갈 정도다. 그리고 그들은 입국때 값싼 중국산 농산물을 사다가 우리 서민들에게 풀어 놓는다. 한때 언론에 고발되어 크게 위축된 바 있으나 어쨌든 그들이 들여오는 농산물이 모자라는 우리식탁의 수요를 충족시켜 줌은 분명하다.

 인천 국제터미널도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국제라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취약하다. 아무리 임시적이라고 하지만 임시라는 명분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어야지 그것을 방편삼아 오래도록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인천항 국제터미널은 임시라는 미명 아래 마냥 방치되어 있다. 규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혼잡 역시 시골의 전래 장터가 유가 아니다. 산더미같은 입출하 화물로 발디딜 틈 없이 혼잡하고 승객 대기실도 비좁은데다 불결하기가 이를 데 없다. 부두의 접안시설도 객선들이 독차지, 가뜩이나 비좁은 인천항 사정을 더욱 옹색하게 한다. 연안부두에 진행중인 국제 터미널의 속한 완공과 이전할 날을 고대한다.

 밤시간이 깊어지자 하나 둘 잠자리로 찾아들고 로비에서 바둑을 두거나 마작판이 벌어지는가 하면 밤을 새울듯 캔맥주를 까며 노래부르는 노래방쪽이 시끄럽고 라운지에서 비디오를 보는 모습이 눈에 띌 뿐이다. 이렇게 해서 배는 다음날 아침 단동의 외항인 동항(東港)에 닿게 된다.

 현재 인천에서 중국에 이르는 뱃길은 매주 화ㆍ금요일에 출항하는 단동행의 「동방명주호」 외에도 다음의 5개 항로가 있으며 더 늘어날 예정이라고 한다.

 ①뉴골든 브리지호=1만6천3백52<&34805>의 산동반도의 첨단 위해행이며 여객 600명에 화물 107<&34805>을 싣는다. 월ㆍ목ㆍ토요일 등 일주일에 3회 출항한다. 인천에서 제일 먼저 항로가 열렸다.

 ②향설란호=1만6천71<&34805>의 역시 산동성 청도행이며 392명 승선에 주2회 출항하며 23일 우리가 승선한 동방명주호가 출항할때 입항하는 향설란과 항내서 조우하느라 중국행이 얼마나 빈번한지를 실감케 했었다.

 ③대인호=1만2천3백65<&34805>, 단동의 이웃 요동반도의 대련행이며 485명 승선에 화물 142<&34805>을 싣는다. 별도로 승용차 112대를 적재할 수 있다.

 ④천인2호=1만2천23<&34805>에 467명을 태우고 175<&34805>의 화물을 적재하며 대인호처럼 승용차 130대를 실을 수 있다. 중국 수도 북경의 외항 천진행이며 천진은 인천과 결연한 자매도시이다.

 ⑤자정향호=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무대이던 상해행으로 1만2천3백4<&34805>에 승객 290명과 화물 256<&34805>을 싣는다. 매주 금요일 1회 출항한다.

 우리가 오가며 두번 신세진 동방명주호는 지난해 7월24일 취항, 한돌이 채 안 된다. 1972년 일본에서 건조, 27년 된 선박으로 6개 선박중 선령이 가장 오래고 크기도 제일 작은 셈이다. 그러나 선박의 길이 119.9m에 무게 1만1천1백3<&34805>이며 최대속력 21노트, 항해속력 18노트로 단동까지의 284마일을 16시간이 소요된다. 승객 250명이 승선하면 수지분계점이 된다는데 우리 일행이 승선했을 때 그 이상이었던 듯하고 우리의 귀로에는 빈방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 한다. 앞으로 주3회로 증회운항 계획이라니 대충 짐작이 갈만하다. 한 승무원의 안내로 우리는 기관실까지 선내를 두루 견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