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미디어 노출/ 손미경 정치부장
17대 국회 첫 국정감사가 끝났다.
전체 의원 중 초선의원이 187명으로 세대교체 폭이 컸던 만큼 이번 국감을 지켜보는 국민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개혁법안의 통과를 공언한 열린 우리당과 거대 여당의 일방 독주를 견제하겠다는 한나라당이 국감을 통해 어떤 세 대결을 벌일 것인 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지난 3주간 언론은 연중 가장 풍성한 뉴스거리로 인해 기사 선별에 애를 먹었다. 의원들이 연일 쏟아놓는 국감 자료, 국감 현장의 발언, 피감기관과 벌이는 논쟁은 지면 곳곳을 장식했다. 국민 뿐 아니라, 의원 개개인도 자신 및 정당과 연관된 내용이 언론에 어떻게 보도되는가 민감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차기 대권을 노리거나, 재선, 혹은 지역 자치단체장 출마를 꿈꾸고 있는 경우는 자신의 국감 활약 보도가 다음 목표를 이루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15대 지역구 의원을 지내고 국민의 정부시절 국책기관장을 지냈던 모 의원은 15대 국회 개원 첫 정기국회에서, 초선의원들의 얌전한 질의 행태로 인해 소속 당의 정책이 언론들로부터 외면받는다며, 한 수 가르쳐 주겠다 하고는 대표 싸움닭(?)이 되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적이 있었다. 자극적인 언어와 행동 덕분에 해당 의원은 이후 텔레비전에 빈번히 노출되었으나, 신문지상에서는 몸싸움과 폭언을 제외하면 달리 글로 남길 만한 내용이 빈약해 결국 기사로 다루어지는 데 큰 손해를 보았다.
국감 기간, 신문사에는 항의성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왔다. 기사를 쓴 기자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한 경우도 있었다.  
항의의 요지는 이렇다. ‘그런 보도를 한 데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 ‘모 당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왜 특정 의원에 대한 기사를 더 많이 내보내는가.’ ‘우리 당측 의원들은 기사 뒷 부분에 나간다.’
기사는 선택이다. 매일 매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 지면에 게재할 수는 없다. 선택의 첫째 요건은 기사의 가치다. 국민(독자)에게 미칠 영향, 중요도, 질이 관건이다. 신문사 편집국 국장과 각 부서장이 머리를 맞대는 편집회의는 수많은 기사들의 가치 중립적인 토론이 벌어지는 자리다. 작은 기사 한 건도 작성 당사 기자 혹은 부장 1인의 의도대로 실을 수 없다는 뜻이다.  
국감 기사도 마찬가지다. 의원들이 준비한 질문의 가치, 비중, 피감기관으로부터 얻어낸 결과물이 논의의 주 대상일 뿐 의원 개개인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 특정 정당에 대한 애증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왜 나는 작게 보도했는가’ ‘왜 우리 정당은 다루지 않았는가’라는 항의를 들을 때면 씁쓸하다. 신문이 새 소식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주 역할이라지만, 특정 인물·정당의 홍보지는 아니다. ‘내가, 혹은 내가 속한 정당이 상대방에 비해 가치 있게 다뤄질 결과물을 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자성과 겸손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기자나 신문사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됐다는 식의 선입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한다.  
기사 선택권은 전적으로 해당 언론사에 있다. 그렇다고 선택권을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인 양 휘두르지는 않는다.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공정·공평한 보도를 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나 신문사의 실수가 있었을 때는 이를 인정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때문에 기사내용이 잘못됐음을 꼬집어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왜 소홀히 취급했느냐는 식의 불만은 애교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여러 언론 매체를 비교하다보면, 특정 정당이나 단체, 개인에 대한 좋고 나쁜 평가가 공통적으로 실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들이 특별히 로비를 해서도, 잘 보여서도 아니다. ‘보는 눈은 똑같다’는 것이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데스크로서 평소 경계로 삼고 있는 경구가 있다. ‘논어’의 술이편(述而扁)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 공자의 성품은 겸손하여 자신의 저술을 두고 “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고 한 것이다. 다수로부터 공감을 얻는 정치인의 말씀을 낙오시킬 논거가 없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