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민주주의는 위기다
도내 한 기초자치단체에 초대 민선시장으로 선출됐던 A시장. 유신시절 그는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던 민주투사였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당내에서 비중 있는 당직도 여러번 맡았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단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취임 후 조직개편을 시도했던 그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중의 하나는 새마을과를 폐지하는 일이었다.
또 다른 시의 B시장. 386세대로 대변됐던 운동권 출신 B시장의 조치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시가지를 수놓았던 새마을기를 아예 게양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임기 내내 새마을단체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리다 결국 재선의 고지를 넘지 못했다. 반대로 거뜬하게 재선에 성공한 A시장, 그가 보여준 재선 이후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먼저 지지기반이 거의 완전히 교체됐다. 야당시절 그를 지지했던 세력은 이탈해갔지만, 대신 기존에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속속 결집했다. 이른바 ‘토박이’로 대변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의식도 뚜렷하게 변해갔다. 처음에 지녔던 문제의식이 현저히 약화된 반면 지역 공간에 대한 효율적 구상이 세련되게 구체화 되고, 시의 각종 계획에 반영됐다. 단체장 4년의 경험은 그를 출중한 문제의식을 지녔던 정치인에서 일약 세련된 행정가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A시장의 의식과 존재의 변화는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 지방자치의 변화와 모순을 함축한다.
첫째, 지방자치가 단순히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였다면 과연 이들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훈련을 거친 관선시대의 행정가들을 능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들이 행정가로 변화하는데 필요했던 4년간의 손실은 무엇을 위해 필요했던 것인지도 정리돼야 한다.
둘째, 이들이 처음에 지녔던 문제의식을 상실하면서 잃은 것이 궁극적으로 주민에 의한 자치를 기반으로 하는 ‘지방자치의 본래의 의미’였다는 점이다.
셋째, A시장을 둘러싼 지지기반의 교체는 지방엘리트에 의한 지배세력의 결집구도를 나타내 준다. 이른바 토호세력의 전면적 등장과 팽창은 우리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지역사회의 사조직의 급속한 팽창과 지방엘리트의 집권, 관료주의의 유착은 우리 지방자치를 토호민주주의의 변질‘로 우려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들의 결탁현상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검찰이 국회에 제출한 자치단체장 관련 비리사건 현황’ 자료에 의하면 2000년 이후 모두 55명의 자치단체장이 기소됐고, 이중 뇌물수수가 47명, 38명은 구속 기소됐다. 이른바 토호나 지방관료주의, 단체장들이 연합하는 관계를 ‘결탁’이라 부르는 데는 이들 조직이 서구의 개념으로 보는 성장연합이나 지배연합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권과 학연, 지연 등을 매개로 하는 이들 사조직의 팽창에 비하면 지방 시민사회의 성장은 맥없이 더디다.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한 각종 협의관행에도 우리는 익숙하지 못하다. 한 마디로 지방민주주의는 위기다.
여기서 우리는 지방자치가 민주주의를 완성시켜 주리라는 그동안의 낙관적 전망이 허구였다는 뼈아픈 성찰과 마주한다. 지방정치가 민주적으로 움직일 여유 공간이 없는 현 상황에서 이같은 편법과 갈등은 필연적으로 재생산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도 피할 수 없다. 이쯤되면 우리는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와 이론상 아무 관계도 없다는 논리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모세혈관이 잘 살아있고 왕성해야 하는 것처럼 지방민주주의는 살아있어야 하고 활성화돼야 한다. 그러나 단체장들이 이처럼 자신을 집행자로 인식하고 효율성에 집착하는 한 토호와의 유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인식이 시민사회에서 그대로 용인된다면 지방민주주의는 더욱 요원할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집행자이기보다 주민에 의한 자치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제도라는 총체적 인식의 전환과 각성이 촉구돼야 한다. /정흥모 수원본사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