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13일 오전 졸업한지 70년 만에 인천 중구 신흥초등학교를 찾은 일본 인천회 회장 가토시로(83)씨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가토시로씨가 다녔던 신흥초등학교는 그 때 ‘아사히 소학교’였다. 일본이 스님이 지금의 자리에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그 때만해도 아사히 소학교 건물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데.” 인천 인구가 20만명이었던 당시 전체 4천명(현재 1천400명)의 학생 가운데 일본인이 1천명에 이를 정도로 꽤 큰 학교였다는 게 가토시로 회장이 더듬는 기억이다.
 교정을 한 바퀴 둘러 보던 그의 손가락은 한 건물에 꽂혔다. 신흥초등학교 건물 뒷편의 ‘답동성당’이었다.
 가토시로 회장에게 답동성당은 전혀 낯설지 않은 건물이다. 16살이 되던해 일본으로 건너가기전까지 줄곧 봐왔던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본적은 사실 중구 신생동이다. 일제시대 인천에서 내노라 하는 부잣집 ‘가등정미소’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도 떠오르는 것이 월미도와 홍예문이야.” 그는 조탕(潮湯)이 있었던 월미도 유원지에서 수영을 하고, 홍예문 근처에서 만두를 사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 도호부청사가 있는 문학산 근처로 놀러 다닌 기억도 그에겐 빼놓을 수 없는 ‘인천에서의 추억’이다.
 “조그만 어촌마을에 불과했던 인천이 이렇게 클지는 상상도 못했어.”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빼곡히 들어선 건물과 널찍한 도로다. 가토시로 회장의 머릿 속에 남은 인천은 허허벌판이나 다름 없는 갯벌과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비좁은 도로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6번째 방문하지만 볼 때마다 변하는 곳이 인천이야다” 인천에 대한 아토시로 회장의 생각은 조그만 시골에서 거대한 국제도시로 바뀌고 있었다./박정환기자 hi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