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동-예전의 쇠뿔고개 우각리는 인천에서 가장 먼저 서양문화가 뿌리내린 곳이다. 그것은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하여 지나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 이전부터 미국인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활약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운 영화여실고 언저리(창영동42번지)가 그렇고 의료선교사 알렌의 별장이었다가 계명학원을 거쳐 전도관으로 변신했던 위치도 그렇다. 그곳에는 지금도 『인천기독교종합복지관』이란 이름의 옛 건물 한 동이 남아있다.

 그곳은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 미국감리교회가 파송한 여자선교사들의 합숙소였다.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890~1905년 무렵 지어진 거의 같은 형식의 서양식 건물 3동중 하나이다. 나머지는 지금의 세무서 자리의 남선교사 사택이고 한국전력 사택 자리의 아펜젤러 집이었다. 그곳에는 한때 한국인 의사의 병원이 들어선 적이 있었으며 한전에 매수되었다고 한다. 훗날 인근에 유신시절 추방당한 오걸 선교사의 주택이 있었던 사실은 우연이라 하기에 너무 각별하다. 남선교사 사택은 해방직전 일인들의 경방단이 입주했었는데 대대적인 개축을 한후 세무서 청사가 되더니 수년전 그나마 헐어내고 오늘처럼 새 건물이 들어섰다.

 단 한 동 남은 『서양집』의 복지관이 지난 29일 개관 5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지난 49년 기독교 정신에 의한 지역 특성에 맞는 사회사업 전개를 목적으로 설립한지 반세기를 맞은 것이다. 돌이켜 복지관 50년사중 의미 깊다면 설립직후 6·25동란을 겪는중에서도 구호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그때 눈물겨운 활약을 한 이가 미스코프이다. 그분은 어려웠던 시절 영세민을 돕는 한편 이웃의 각급교생들을 모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녀가 귀국한후 66년부터 오랜 전통처럼 미국인이 운영해오던 경영권이 우리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초창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도 건물이 낡아 도심을 벗어나 적지를 물색중이나 여의치 않다는 뒷이야기도 들린다. 우리 손으로 돌아온 이상 복지사업은 우리 힘으로 운영됨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