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가 우리에게 고속 교통 시대를 가져다 주었다면 고속도로는 철도보다 이용 공간이 훨씬 넓은 공로(公路) 수송 시대를 열게 한 주역이다. 일반적으로 철도의 개설을 교통의 제1혁명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교통의 제2혁명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경인고속도로. 인천과 서울을 잇는 이 고속도로의 건설은 바로 우리나라의 수송구조를 철도에서 공로 중심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오늘날에는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인해 「달리는 주차장」이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 도로는 개통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로 모든 국민들에겐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다.

 더욱이 1969년 7월21일 개통 당일에는 미국이 쏘아 올린 우주선 「아폴로 호」의 우주인이 지구인으로는 처음으로 달을 밟은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이 도로의 건설 의미를 한층 더 해 주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월행(月行)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 빠름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독자적인 월행이 가능하리라는 연상을 부추겼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고속도로 건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일본의 나고야 고속도로가 착공된 직후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열악한 재정 사정 등으로 인해 건설부 등 정부 내 일부 부처와 건설 전문가에 국한된 것으로 건설논의가 본격화되려면 6~7년을 기다려야 했다.

 『…박대통령은 1964년 12월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공식 방문하던 중에 「아우토반」이란 독일의 고속도로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한 후 고속도로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는데…』(한국도로공사 20년사)

 이후 1965년 9월 우리 정부로부터 용역을 받아 작성된 세계은행(IBRD)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종 보고서는 당시 초보 수준에 불과하던 국내의 고속도로 건설논의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됐다.

 『…과거 12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도로망 상태는 대단히 나쁘다. 모든 노력은 처음에는 전재 복구에 치중되고 1962년부터 겨우 복구와 현대화에 주력하였다. 1966년에도 도로망이 현대화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사의 질은 일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우리는 한국의 도로를 조사할 때 1946년 이전에는 한국에서 현대적인 도로가 구상된 적이 없고 따라서 한국은 도로사업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는 것을 항상기억해야한다.』

 불붙기 시작한 고속도로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1967년 4월 경인, 경부 고속도로 등 4개 노선에 대한 건설계획을 담은 대국토건설계획이 마련되면서 곧바로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건설 구상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서 국내외의 반발과 회의적인 반응이 거세게 일었다. 세계은행조차 건설비와 관리비 때문에 경제파탄이 올 것이라 경고하고 나설 정도였다. 건설계획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수송체계는 이와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경제력의 70% 이상이 집중돼 있는 수도권의 관문으로 주요 수입항이었던 인천항의 경우만 해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이용 물동량이 폭주했으나 배후 수송망이 부실한 탓에 교통체증은 날로 악화돼 갔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그 상태가 경제개발 추진을 제약할 정도였다.

 정부는 급기야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경인,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했다.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를 순수하게 우리 자본과 우리 기술만으로 건설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무모한 도박이라는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67년 5월1일 기공식을 갖고 경인고속도로 건설공사가 본격화됐다. 착공 당시의 계획에 의하면 이 고속도로는 1969년 말 준공 목표에 총연장 32㎞, 노폭은 31m에 6차선 규모였다. 그러나 정부와 청와대는 연이어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1968년 2월말 준공 시점을 1968년 말로 예정보다 1년 앞당기기로 하는 한편 건설 규모도 축소해 당초 6차선 31m였던 노폭을 4차선 20.4m로 조정했다. 고속도로 건설이 그만큼 화급했던 것이다.

 계획이 급변하면서 건설공사는 초기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착공 당시 우려했던 자금보다는 중장비 확보가 난제였다. IBRD가 당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1965년 현재 국내 토건업체가 보유하고 있던 중장비는 모두 1천6백47대. 하지만 대부분이 구식이고 노후화돼 산과 암반을 뚫는 대역사(役事)인 고속도로 공사에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경인, 경부 고속도로 건설 공사가 동시에 시행된 탓에 장비의 부족 문제는 심각했다. 급기야 비상 조치로 외국으로부터 중장비가 긴급 수입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1차 계획 구간(영등포~가좌동) 중 영등포~부평 구간 23.5㎞가 1968년 7월21일 우선 개통됐고 나머지 구간으로 연약 기반인 부평~가좌동 교차로간 6㎞는 한국도로공사 주관으로 1969년 7월21일 끝이 났다. 이어 2차 계획 구간인 가좌동 교차로~인천항 제2독까지 0.484㎞가 1973년 4월19일 완공됨으로써 비로소 경인고속도로 29.984㎞ 전 구간에 대한 공사가 완료된다.

 갖은 난관을 뚫고 개통된 경인고속도로는 비록 총 길이는 얼마 안되지만 우리의 순수 기술로, 그것도 초단기에 건설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쾌거로, 그리고 이후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건설 등 고속도로 시대와 고도 성장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됐다.

 뿐만 아니라 이 도로의 개통으로 인천~서울간 왕복에 소요되는 시간이 종래 1시간에서 24분으로 단축돼 주민 편익이 증대되고 수송비 절감으로 경인 지역 개발과 공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인고속도로의 건설 효과는 채 20년도 가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밀려드는 자동차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교통체증이 연일 지속됐다. 경제 성장은 계속됐으나 사회 간접 시설에 대한 투자가 늦어진 때문이었다. 고속도로 이용자들 사이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사정이 이러하자 정부는 인천을 기점으로 한 물류 개선 대책을 마련하고 경인고속도로 확장과 제2경인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신설공사를 잇따라 실시한다. 이중 특히 서해안 고속도로 건설은 인천에 있어 경인고속도로에 버금가는 교통혁명적인 일로 받아 들여 지고 있다.

 이 도로가 착공되기 전만 해도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역할에 따라 도로의 대부분이 동서로 가로 놓여 있어 도로체계는 점차 지역 발전을 저해하고 심지어 서울에의 종속화를 가속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이에 따라 인천에서 한반도 남쪽을 잇는 도로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져 갔고 이런 요구에 부응해 착공된 것이 서해안고속도로였기 때문이다.

 인천~목포간 353㎞를 연결하는 대규모 고속도로로 1990년 착공돼 2001년에 완공될 예정인 서해안고속도로는 지난해 1차로 인천~안중간 70.3㎞가 개통되면서 인천~서울간 도로에 집중됐던 교통량 분산과 더불어 인천이 서해안 일대 지역과 연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김홍전기자〉 hjkim@incho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