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예전 대개의 가정들은 월미도에서 벚꽃놀이 하던 낡은 사진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가친척 여럿이 찍은 단체거나 한껏 멋을 낸 독사진을 앨범이나 안방 벽의 액자에 걸었었다. 그만큼 별로 봄나들이 갈곳이 없던 시절 월미도의 벚꽃놀이는 자랑이었다. 그러면서 월미도는 어찌 되어 있으며 언제쯤 개방되겠는지를 묻기도 한다. 연세가 지긋하여 월미도에 향수를 가지신 분들이다.

 적어도 월미도의 한자 이름으로 보아서는 섬의 생김새가 달의 꼬리 같겠지만 여기저기 바다를 메운 지금은 섬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육교로 연결 섬이 아니던 것이 다리 양켠을 메우느라 완전히 육지화되었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대형 저유탱크가 좌정했다. 섬의 많은 부분을 군이 차지 일반 시민은 회주도로 주변을 맴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옛 명승은 간곳없고 삭막하기 조차하다.

 당초 이 섬을 관광지로 가꾼 것은 일인들이었다. 러일전쟁때 군용지로 요긴하게 이용한 그들이 인천역 쪽에서 석축 제방도로를 만들어 섬둘레에 벚나무를 심고 모래를 퍼다부어 인공의 해수욕장을 만들었다. 북쪽 끝머리의 조탕과 용궁각 등은 경향각지에서 찾아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도 종종 발견되는 그시절 사진들을 보면 오히려 이국정취를 느끼게도 한다.

 월미도가 일반시민의 범접못할 곳이 된 것은 6ㆍ25의 덕분이다. 하기는 8ㆍ15 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미군이 차지했다가 반환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중에 6ㆍ25가 발발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현장이기도 했던 월미도는 그 이후 줄곧 군사기지가 되었다. 휴전후에는 소위 적성국 감시위원단 추방요구 시위가 월미도 입구에서 연일 벌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처럼이나 전란때 황폐했던 섬은 지금 울창하여 꿩과 다람쥐의 낙원으로 변해 있다.

 올가을 군부대가 이전하고 이어 월미도가 시민들에게 완전 개방되리라 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오랜 세월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은 없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하는 세월동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