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전반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만주족 오랑캐(淸)의 무력에 무참히 굴복함으로써 문화적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중화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질서도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일대 재편의 계기를 맞는다. 마땅히 조선의 대중국외교 관계도 명에 대한 사대(事大)에서 청에 대한 사대로의 전환을 강요받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청의 요구를 거부하고 망국 명에 대한 의리를 천명한다. 멸망한 중화의 중심 명에 대해서는 대명의리론을, 내부적으로는 중화사상을 이어받은 적통으로서 소중화주의를 근간으로 청에 대한 반청적 북벌론으로 중국과의 전선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처럼 관념적 대외명분론이 조선의 사상적 기초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 사이에도 이에 대한 반발은 있었다. 또 다른 사상적 지향이 싹트고 있었다. 북벌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청의 중원지배를 현실로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조선의 역사전통을 중국 요순시대와 비견되는 것으로까지 끌어올리면서 북벌과 명에 대한 보은을 회의했던 성호 이익같은 학자도 있었다. 결국 관념적 기초위에서 생기를 잃어가던 조선 사상계의 물줄기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데는 이른바 북학으로 통칭되는 연암 박지원과 그 일파들의 치열한 고뇌가 있었다.
연암은 당시 권력의 중심부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던 노론계의 자제였지만 사대부로서의 길을 마다하고 시대적 고민과 맞섰던 지식인이었다. 연암은 특히 지도층(士)의 사회적 책임에 주목했다. 그가 6개월간의 청나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남긴 대문장으로서의 열하일기는 바로 북학사상의 진수요, 신문체의 보고였다. 북학론의 대두는 사회 밑바닥에 흐르던 역동성과 사상적 다원성을 일정하게 담아내면서 생기를 되찾는 계기가 됐다.
당시 주자학에 기초한 명분론이 활기를 잃고, 북벌이 지도적 가치를 상실해 국가와 사회가 좌표를 잃었을 때, 연암이 서화담의 일화를 통해 제시했던 진단과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서화담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울고 서있는 사람을 만났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라!(還他本分)”

길이 안보이기는 지금 우리 상황이 그렇다. 파병을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행정수도이전을 놓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마침내 김선일씨의 죽음으로 우리는 모두 말을 잃고 말았다. 넋을 잃고 길을 잃었다.
파병을 하자는 것도, 파병을 말자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행정수도를 이전하자는 것도 말자는 것도, 급격한 이념적 분화도 병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담아내는 체제와 문화를 빨리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사심없는 지도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개발하고 통합하고 조직화할 리더쉽이 고갈되고 있다.
정부를 봐도, 여를 봐도, 야를 봐도, 소위 차세대 정치인들을 봐도 기대가 없다. 파병과 동료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젊은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아예 기가 막히다.
개혁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략적 주장과 대중 영합주의에 매몰된 야당, 기회주의적 속성부터 익혀가는 젊은 정치인들, 정략적 발상 속에서는 새로운 리더쉽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민은 정말로 기댈 곳이 없다.
정부와 여당은 오늘의 이 위기 속에서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야당은 끊임없이 정략적 발상에 매달리면서 새로운 리더쉽 창출에 실패하고 있다.
좌표 없는 시대,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연암의 충고는 어떨까.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