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때 사람 이륙(李陸)의 중국 견문기 『청파극담(靑坡劇談)』에 부싯돌 이야기가 나온다. 즉 옛날 사람들이 양쪽 허리에 부싯돌을 넣고 다니며 불을 얻었는데 행군하기에 요긴했다는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서인 『단군세기』에도 부싯돌을 단군의 세아들중 한사람인 부소(夫蘇)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훈익옹은 『인천지지』에 오늘의 계양산에서 나는 돌이 불을 잘 일으키기로 유명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아득한 태곳적부터 돌을 마찰 불을 일으키던 방법은 놀랍게도 우리나라에 성냥이 들어오던 한세기 전까지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몇십년 전만 해도 시골 노인들은 부싯돌을 담배 쌈지에 넣고 다니며 담배를 태웠다. 실은 지금 편리하게 이용되는 라이터도 부싯돌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시시대의 발화법이 지금껏 지속되는 셈이다.

 라이터의 등장은 19세기초였다. 1816년 프랑스의 프랑스와 드로슨이 인을 이용한 마찰 라이터를 발명했으며 같은 시기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로 볼타가 최초의 가스라이터를 발명했다. 그러나 어느것도 호기심에 의한 발명의 첫단계였지 위험성 때문에 사용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겨우 19세기말 손으로 줄 바퀴를 당겨 점화시키는 라이터가 등장 드디어 실용화되었다.

 한편 1회용은 전혀 의외였다. 라이터 메이커인 듀퐁의 공장내에서 흡연을 엄금하자 한 근로자가 몰래 시가레트 라이터를 고안 즐기다가 감독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기발한 발명품이라는 반응으로 화를 면하고 그 원리를 이용 플라스틱 용기를 부착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섬세하게 디자인된 미장품에다 전자용이 쏟아져 나온다.

 최근 1회용의 중국산 덤핑으로 국내 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연간 소비량 1억5천만개중 절반이나 점하고 있단다. 계양산의 부싯돌 후예여서일까. 사실 인천은 라이터의 생산도시였다. 그러나 근래 이런저런 이유로 사양화하고 있다. 중국산의 무차별적 공략에 그나마 설땅을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