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성향이 비교적 강한 인천 화단에서 30여년간 꾸준히 작품으로만 말하고 실천해 온 강난주(姜蘭珠ㆍ55)선생이 차지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미 10대의 나이에 동정(東庭 박세림ㆍ본보 98년 8월28일자 참조)문하에 들어가 사사하고 20세의 인천교대생이던 1965년 국전에 초입(初入)한 이래 한국화와 서예분야에 국전 8회 입선이라는 여류로서는 흔치 않는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1975년 2월2일 동정이 작고하자 그의 서실을 운영하며 스승이 생전에 남긴 짐을 정리했던 그야말로 동정의 적통(嫡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서예를 수련한 학생이 미술대학에 들어가면 곧바로 회화로 전향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동정의 권유로 인천교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그의 집념을 떨치지 못하고 40가까운 나이에 인천대학교 미술학과에 편입하여 그만의 독특한 형식미를 갖는 작품을 그리고 있는 중진 화가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드라마틱한 여정의 이면에는 그의 예술적 재능을 미리 발견하고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은 부모님의 노고가 있었다.

 월강은 해방의 환희가 전 국토를 휘감던 1945년 인천시청의 국장로 재임하던 강우수씨의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취학전 할머니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 그는 서림초등학교 재학 시부터 이미 배운 한문실력을 바탕으로 서예에 두각을 나타낸다.

 그후 인천 사범 병설 중학교에 들어간 강난주는 2학년이던 1959년 동정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천여고를 거쳐 인천교대에 들어간 그는 1965년 제14회 국전에 「마상속잔몽(馬上續殘夢)」을 출품하여 입선한 후 국전에 8회 입선(회화 1회)함으로써 인천 출신 여류작가로는 국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대학 졸업후 약 4년간 이천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교직을 그만두고 작품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후 전술한 바와 같이 동정 사후 그의 서실을 맡아 운영하며 주로 남자들이 판을 주도하는 서예계에서 여류서예가로서 입지를 굳혀간다. 그가 국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보게돼서 어려서부터 꾸준히 습득해온 한자실력을 바탕으로 해ㆍ행서를 주로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근자에는 행서의 격조가 무르익어 일품의 경지에 이른 느낌이다.

 특히 80년대 후반이후 전서ㆍ예서ㆍ초서에까지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직까지도 꾸준히 연서(硏書)함으로써 격을 계속 높여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한편 이미 중진 서예가로 경향(京鄕)에서 인정을 받아오던 강난주는 갑자기 38세의 나이에 인천대학교 미술학과 2학년에 편입한다. 가정주부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이고, 이미 중진 서예가이기도 한 그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막냇동생 또래의 대학생들과 함께 한국화를 공부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이미 그가 갖고 있는 회화 역량을 확인시키고자 하는 기염이었다고 보여진다. 월강은 대학 진학 이전에 이미 이당기념관에서 장주봉 선생에게 표현의 기본을 습득한 바 있고 대학에서는 주수일 교수에게 실경표현 및 현대적 표현기법에 관한 조언을 듣는다. 기왕에 시작한 미술공부를 대학원에서까지 연결시킨 그는 인천교대와 인천 대학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인천 여류 작가전」 「전국 동ㆍ서양화 중진 작가 초대전(1995)」 「인천 현대 미술 초대전」 「인천대 교수 작품전」 「독일 괴테 연구소 초대전」 「독일 루카스 화랑 초대전」 「독일 슈발바흐시 시장 초대전(1996)」 「96 인천 미술의 단면전」 등에 출품하면서 그의 미술적 역량을 확인 시켜왔다.

 서예적 감성에 현대회화의 방법론들을 수용하여 표현한 그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 앵포르멜 계열의 표현기법과 상통하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오히려 문인화에 가깝다. 95년 인천 종합문예회관에서 가진 개인전의 출품작들은 그가 가진 매체적 관심이나 표현의도가 다분히 감각적으로 보이나 그 기저에는 아직도 서예가로서의 자존을 잃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형식보다는 화의(畵意)가 그렇다는 말이다. 일례로 「회고」(그림참조)라는 작품을 보게 되면 바탕화면에 은은히 드러나는 판본체의 문자와 초서체의 문자를 볼 수 있는데, 물론 이것은 메시지라기보다는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여 제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예가로서 또는 화가로서의 양자택일적 입장에 있는 당시 그의 정황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서울 미협에는 한국화 분과에, 인천 미협에는 서예분과에 가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예와 회화, 즉 상호보완적인 두 장르를 포용하며 자신의 예술의 폭을 넓혀가고자 하는 그의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선현들은 시서화 일체(詩書畵 一體)라하여 글씨와 그림을 하나로 보지 않았는가. 그런 점은 최근 그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모노크롬 계열의 작품에서도 간취되는 현상인데 이는 그가 가진 서예적 역량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자 그의 작품의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경모ㆍ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