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림/인하대 불문과 교수

 마틴 뷰버에 의하면 참된 삶은 「만남」이며 「나는 나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못하고 다만 근원이 「나」이거나 또는 「나ㆍ그것」으로서의 「나」로 존재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경험 대상으로서의 세계는 「나ㆍ그것」의 근원어에 속하며 근원어 「나ㆍ너」의 경우는 관계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병적 증상중의 하나는 주체와 주체의 인격적 교섭의 끊어짐에 있을 것이다. 「나ㆍ너」의 관계는 사라지고 「나ㆍ그것」의 관계가 일상적 세계를 강풍처럼 휩쓸고 있다. 이처럼 황량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비인격화하고 물건화하는 사태를 빚어내며 인격과 인격의 만남 대신에 서로 물건을 소유하려는 비극적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부서지고 다만 기계적 조직체로서의 냉혈적 사회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연대의 고리로 이어져 있는 「우리」라는 관계가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차갑게 단절되고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게 된 타락한 시대일망정 욕망과 행복의 문을 여는 진정한 즐거움으로서의 에로스의 회복을 통하여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마르쿠제가 제시하는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찾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적, 감상적인 요소와 지적, 과학적인 요소, 그리고 행동적, 기능적인 요소가 골고루 조화롭게 성취된 인간의 성숙한 자아가 나아가야 할 선택의 방향은 오로지 평등한 대화가 가능한 사랑의 길 뿐이다.

 인간을 물건화하고 상품화하는 현대사회의 체제 속에서 모든 것은 교환가치에 의해 그 의미가 규정된다. 오히려 순수한 창조적 행위로서의 일에 봉사하는 사람은 자칫하면 「문제적 개인」으로 이 사회 안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무가치한 시대착오적 환상주의자로 취급되기 쉽다. 그러나 이와같이 세계를 한낱 효율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모든 것을 실제적 유용성의 교환가치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다면 거기에는 생산성이 문제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탈과 착취, 억압과 폭력이 지배하는 싸늘한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헤치고 인간다운 삶과 꿈이 아름답게 실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참다운 에로스의 회복, 즉 지나친 쾌락지향적 욕망을 적절하게 규제하여 낮은 짐승의 상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