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아파트시대 개막

 개항 이후 100여년이 지나면서 인천의 주거양식은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주택난일 게다.

 인천항의 문호가 열린 뒤 외국인과 경향 각처 사람들이 밀려든 탓에, 그리고 해방과 6ㆍ25 동란 직후에는 해외 동포와 피란민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주택 부족 문제는 지역 사회의 최대 현안이었다.

 더군다나 휴전 후 미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주택의 상당수가 파괴된 가운데 피란민들이 구(舊) 시가지 외곽에 정착하면서 이 일대에는 판잣집이 즐비했다. 수용소촌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미군 원조가 되면서는 부흥주택, 재건주택이라는 이름의 주택이 우후죽순처럼 급조됐다. 이 주택은 건평 9평에 방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 짜리였으나 건축 자재가 부족한 탓에 주로 타일을 칠한 루핑과 흙 벽돌을 재료로 썼고 그 규모도 작아 입주자들이 생활하기에 불편이 컸다.

 사정이 이러 하자 인천시는 1960년대 중반에 들어 주택난 해소를 시정(市政) 10대 목표의 하나로 잡고 주택 5개년 계획을 세워 불량 주택 개량과 신규 주택 공급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재정난 때문에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제 시 당국이 당시 건설한 주택 수는 철거 주택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해 한쪽에서 무허가 판잣집이 헐리고 있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판잣집이 생겨 나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인천신문 등 당시 지역신문들과 시민단체들은 이에 연일 주택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한편 시 당국에 새로운 해결책 마련을 촉구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주택난 해결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아파트였다. 주택 건설을 위한 재원 조달 문제로 고심하던 시 당국은 한정된 재원을 가지고 주택보급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주택의 고층화 정책을 도입키로 하고 1968년 초 서민용 아파트 건설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이 해 4월18일 숭의 시영아파트가 착공됐는데 이것이 인천 아파트의 효시이다. 이 아파트의 착공은 1956년 국내 최초로 아파트가 건설됐던 서울에 비해 10여 년이 뒤졌지만 지역내 주거양식을 한옥에서 아파트로 바꾸는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당시 이 아파트가 들어선 숭의동 119번지, 지금의 숭의동 야채시장 뒤편은 오래 된 한옥이 즐비한 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 외국 잡지나 외국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신문에서나 봄직한 아파트가 세워졌으니 「성냥갑 같다」느니 「벌집같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건물은 4층짜리 2개 동에 80세대가 들어가 살 수 있게끔 지어졌다. 한 칸 면적은 15평, 온돌 방 2개에 부엌, 화장실 그리고 마루로 돼 있었다. 연료는 연탄을 사용했다. 이 아파트는 97년 재개발되어 지금은 그 자리에 11층 규모의 1개 동짜리 극동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인천시는 연초 발표한 서민용 아파트 건설 계획에 따라 이 해 하반기 들어 도화동에 2개 동 80세대, 갈산동에 3개 동 120세대의 아파트를 건설했고 69년에는 2개 동 96세대, 70년에는 8개 동 280세대의 아파트를 지었다.

 하지만 경제개발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불량 주택에 대한 철거 사업이 본격화되자 주택의 부족 현상은 오히려 심화돼 주택 보급의 척도가 되는 주택 부족률이 68년 34.3%에서 69년 39.4%, 70년 42%로 늘어만 갔다.

 당시 지역내 아파트 보급을 전담했던 인천시는 이에 주안과 부평 등지에 시가지를 새롭게 조성하고 주택 공급 방법으로 아파트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나갔다. 이런 까닭에 60년대 10년간 1만9천3백11세대에 불과하던 지역내 신규 주택 공급량이 70년대에는 10년간 6만9천3백9세대로 4배 가까이 늘어 났고 아파트의 비중도 60년대 2%에서 70년대는 20%로 급증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 중 주택건설 기관도 다양해졌다. 현재 주택건설 기관의 대표격인 한국주택공사가 1972년 처음으로 부평 5공수 터에 13평형 100세대 규모의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아파트 공급 대열에 가세했고 인천개발공사가 1975년 남구 숭의동에 다복아파트를 지으면서 민간 업체들의 진출 문호를 열었다.

 건설기관이 확대되면서 80년대 들어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해 1980년부터 85년까지 건설된 주택 8만1천1백79세대 가운데 아파트가 4만4천78세대로 절반을 넘었고 이후 그 비중은 더욱 확대돼 갔다. 특히 1986년 이후 정부의 2백만호 건설 계획이 본격 시행되면서 구월, 부평, 일신, 계산, 연수 등 지역내에 10여개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고 불량 주거지에 대한 개량사업도 잇따라 주택공급 물량이 폭증하고 아파트도 연평균 1만∼2만 세대가 건설돼 80년대 초반의 2배 수준에 달했다.

 이 결과 지난 97년부터는 전체 주택에 대한 아파트 비중이 50%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주거양식을 주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아파트 유형도 다양해진다. 87년에 준공된 계산지구 학마을 한진아파트를 시작으로 90년대에 들어서자 세입자를 위한 장기 임대아파트 건설이 잇따랐다. 이어 영세민을 위한 영구 임대아파트가 90년 12월 준공된 만수아파트를 필두로 삼산 갈산 선학 택지개발지구내에 속속 들어서고 일하는 사람을 위한 사원 및 근로자 아파트도 연수와 삼산 택지내에 세워졌다. 아파트가 그 유형면에서 춘추 전국시대를 맞은 셈이다.

 그러나 그 동안 정부와 민간업체 구분 없이 주택의 고층화에 주력한 결과, 아파트촌이라는 별칭이 나올 정도로 아파트가 시내 곳곳을 뒤덮으면서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인천지역 아파트 거주자의 상당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생활 여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라는 조사결과가 잇따르고 있는 것은 아파트 일색의 주택 정책이 빚은 문제점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삭막한 아파트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면서 전원 생활을 동경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전원주택이 새롭게 각광을 받는 등 또 다른 주거문화가 형성돼 가고 있다. 〈김홍전기자〉 hj kim@inchonnew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