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이어져온 우리나라 총선에 여러 고비가 많았으나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남는 선거는 85년 2.12 총선(12대)이다.
창당 25일 밖에 안된 ‘선명’야당(신민당)으로 하여금 서울, 인천등 대도시를 휩쓸게 함으로서 ‘민심’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 2.12는 광주를 유혈진압하고, 전투경찰과 최루탄으로 정치 사회를 억압해온 전두환 정권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투표율 84.6%라는 민심의 ‘절박함’이 견고하게만 보였던 억압의 정치, 그 두터운 외피를 슬쩍 벗겨놓은 것이다.
당시 선거결과, 여당이 여전히 과반수의 제1당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야당의 승리였다. 신민당은 67석의 제1야당으로 떠올랐고 곧이어 제2야당으로 전락한 민한당을 흡수해 102석의 거대 야당을 탄생시켰다. 그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로 민주화의 방향을 틀어잡는다.
그리고 2년 뒤 2.12 민심은 결국 5공 정권의 4.23 호헌조치를 6.10 시민항쟁으로 무너뜨리고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라는 결실을 이뤄낸다.
그러나 어렵게 이뤄낸 직선제 앞에서 야권은 끝내 분열했고 민심은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민심은 흩어져 상당 기간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른바 ‘떠돌이 민심’이다.
87년 대선 후, 88년 4월의 제13대 총선은 국회를 여소야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여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제3야당인 공화당이 통합, 민자당을 창당함으로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에 과반을 허용치 않는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과정들을 거치며 여,야 할 것없이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떨어져갔고 투표율도 매번 큰 폭으로 하락해갔다는 것이다. 국회는 여전히 지역주의에 기대고 있었고 정경유착, 부정부패, 극한대립, 민생외면으로 점철했다. 13대에 75.5%로 뚝 떨어진 투표율은 15대 63.9%, 16대 땐 57.2%로 추락했다. 도무지 정치 전반에 신뢰를 줄 수 없었다.
총선에 민심이 부분적으로 드러난 것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호응이었다. 지역주의 벽은 깨지 못했으나 이때 낙선운동은 86명의 대상자 중 59명을 탈락시켰고 특히 수도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상자 20명중 19명을 떨어뜨리는 위력을 발휘했다. 여, 야의 극한 대립으로 식물국회, 파행국회로 낙인찍힌 15대 국회였다. 16대 총선을 앞둔 낙선운동은 부정부패와 철새정치에 대해 ‘인물’을 보자는 민심의 발로였다.
유연해 보이기도 하는 민심은 사실, 냉정하며 준엄하며 가치지향적이다. 그리고 평범한 상식과 이성에 기반해왔다. 그리하여 서슬퍼런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 부정부패의 음습한 그늘을 뚫고 오늘의 한국을 지탱하고있다.
17대 총선은 이른바 탄핵정국으로 요동친 민심이 발동된, 매우 격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고있다. 탄핵 정국 전 50% 전후를 맴돌 것으로 예상됐던 17대 총선의 투표율이 국회의 탄핵 가결 이후 70%를 웃돌 것으로 관측된다.
국세청, 안기부등 주요 국가기관까지 등장하며 끊임없이 출몰하던 추악한 정치자금의 실태가 ‘차떼기’로 그 종국을 맞이한 16대 국회는 잘났건, 못났건 최소한 ‘대∼한민국’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오늘의 민심일 것이다. 탄핵 대상이 되느냐, 마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지난 십수년간 보여준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들이 너무 후진적, 퇴행적이었기에, 탄핵에 대해 ‘국회의 정당한 법적 권한’이라거나 ‘대의제 정치의 승리’라는 주장은 결코 지금의 민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민심은 늘 살아 움직이고있다. 단지 자신의 오만과 과욕에 갇혀있는 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