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해전 옛 화도진 지도가 공개된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송림이 우거지고 지금의 화수동과 송현동 사이로 여러갈래의 구불구불 작은 개천이 한줄기로 모여 흐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의 수문통일대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과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세기』에도 대충 그렇게 적고 있다. 바다로 흐르는 큰 갯골이 있어 그곳으로 서울서 전환국이 내려올때 기계를 하륙했는데 송현동 언덕의 주민들 빨래물로 황폐화 갈대밭이 무성했다는 것이다. 송현동 주민이란 갑신년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이 전환국터에 주둔하면서 쫓겨난 이를테면 철거난민들이었다. 갑신년은 1904년으로 그해 2월 러일전쟁이 개전되었다.

 황량했던 이곳 일대가 송현동 언덕을 헐어 공장지대로 조성되었다. 그때 화평동으로 해서 배다리까지 ㄱ자로 꺾이는 하수로를 뚫고 하류에 수위조절의 수문으로 막았다. 아마도 수문통이란 이름은 그래서 지어진듯 하다. 그런데 보상과 노임문제로 주민과 노무자들의 불평이 컸다고 당시의 동아일보는 전한다.

 갈대밭 황무지의 이곳 일대를 매립한 것은 당시 상공회의소 회두 일본인 요시다(吉田秀次郞)로 전해진다. 지금은 불타고 없는 양관 오례당에 살면서 매립으로 번 돈에서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송현교는 사립학교였다.

 손바닥 만한 배가 닿고 밀물때를 기다려 운하 처럼 거슬러 오르던 수문통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우선 화평교 양쪽을 복개 냄새나는 하수를 눈가림했다. 그러나 이번엔 복개한 바닥에 촌락이 형성되었다. 무질서하게 영세상가가 형성되고 하류의 나머지 마저 복개되었어도 철거를 못하고 방치되어 왔었다. 오늘날 처럼 판자촌을 철거하고 훤하게 대로가 뚫린 것은 96년 9월이었다.

 그러나 인근 주민들의 바람은 이곳을 문화체육 공간과 차없는 거리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도 뜻대로 되어지지를 않는다. 이곳에 간단한 운동시설과 화단을 꾸미고 벤치라도 놓인다면 빈약한 동구의 광장명소가 되겠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