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젊어 권력을 쥐고 마흔하나에 요절했으나 수백년이 지난 요즘에도 심심찮게 TV사극의 주인공을 차지하는 역사적 스타다.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성균관 유생들의 지지와 갖바치와 교분을 가질 정도로 기층 민중으로부터의 성원이 뒷받침된데다 중종의 총애에 힘 입어 서른여섯에 대사헌까지 올랐다.
 개혁을 위한 그의 노력은 처절했지만 훈구대신들의 덪에 걸렸고 반격을 당하면서 자신의 일파와 함께 유배돼 사약을 받았다.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세 사가(史家)들은 그의 진보적 의지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나친 배타성, 현실을 무시한 조급증이 일을 그르쳤다고 지적한다.
 사극에서는 곧잘 구중궁궐을 중심으로 한 권력 심부의 권모술수와 정의로운 정암이 대비된다.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스물하나에 장원급제해 승승장구 벼슬 길을 내달렸다.
 양반이나 중인, 서얼을 가리지 않고 개혁 세력과 호흡을 함께 하며 세력을 끌어모았다.
 넘치는 기개와 발빠른 판단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노리면서 서른셋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로 끝났다.
 2004년 갑신년의 꼭 120년전 일어난 갑신정변은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고 그 핵심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한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됐다.
 유랑하던 고균은 마흔셋에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 역시 오늘날까지 영화며 TV사극의 영원한 주인공이다.

 정암이나 고균 두 인물 모두 젊음과 개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면서 정작 그들의 거사는 비극적 결말을 갖고 있다.
 두인물의 시대적 상황도 일견 흡사하다.
 정암의 시대는 연산군의 폭정 이후 중종 반정을 딛고 일어선 정치적 격변기였고 고균의 시대 역시 두말할 나위없는 근세사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일을 도모한 주체세력이 청렴하였고 그들의 뜻이 순수했는데다 구태에 안존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제를 위해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들의 실패는 아픔이었고 역사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정암 일파가 숙청된 기묘사화 이후 정치권의 삿된 당쟁은 무대책의 왜란을 불렀고 고균 일파가 내몰린 후 조선의 지도부는 외세의 주구들간 파벌 싸움에 결국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치를 보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제 각각이다.
 조선시대 연이은 사화가 벌어짐에 대해서도 사악한 무리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모습에 쾌재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던가 하면 억울한 모함과 중상에 통분하며 절치부심, 뒷 날을 기약하는 부류도 있게 마련이었다.
 시대를 보는 눈 또한 마찬가지.
 나라의 운세가 풍전등화에 걸렸어도 상황의 심각성을 보는 눈 역시 제 각각이고 해법 또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작금, 기라성 같은 정치적 스타들이 연일 옥(獄)으로 옥으로 향하는 모습을 두고도 정치적 반대파가 힘의 논리에 내몰리는 21세기 형 사화(士禍)로 보는 눈이 있는가 하면 우리 정치권이 이제 비로소 구태를 벗고 정의와 개혁이 바로 서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북한을 둘러 싼 최근의 국제정세가 아무리 우리 근대사의 100년전 당시와 흡사하다 해도 오늘의 계급적, 계층적, 당파적 입장 차이는 민족과 민중의 가치기준을 쉽게 넘어서고 만다.
 사화든 정변이든 갑신년 올 해는 유난히 역사적이다.
 역사의 교훈으로 눈 부릅 뜬 백성들, 바로 그 새 역사의 중심에 그들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