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정치부장
 속담에 ‘굿 판 벌이려해도 며느리 궁둥 춤 추는 꼴 보기 싫어 못한다’는 말이 있다.
 볼거리 놀거리가 없던 시절, 어쩌다 벌어진 굿 판에서 징 장구 가락이 울리면 그 신바람에 철 없는 며느리 방정머리 없이 어깨를 들썩거린다.
 이래도 밉고 저래도 밉살스러운 며느리를 보는 시어미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건 당연지사다.
 고부관계란 참으로 어려운 게 우리네 인지상정이다.
 누구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공연한 갈등이 계속되면 집안엔 바람 잘 날 없게 되고 안팎으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그래도 갈 데까지 안가면서 서로 참고 참다보면 언젠가 옛날 얘기 하게 됐다.
 방 구들 지고 누운 시어미 힘 빠진 눈으로 “우리 며느리 애 썼다” 한 마디에 지난 세월 시집살이 설움 눈 녹듯 사라졌고 어른 작고한 뒤 그 제삿상 앞에서 서럽게 우는 건 또한 며느리 몫이기도 했다.
 정치가 무에 다를까. 말이 좋아 여야간 상생 정치지,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저 겉 표정으로야 짐짓 젊잖은 척 해도 속은 편 할리 없는게 권력을 다투는 정치인의 생리다.
 다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려 말씨나 행동거지, 모양새를 잘 갖추면서 조화를 이뤄내는 일이 프로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고 나아가 그들이 국민들에게 의당 베풀어야 할 기본 자세다.
 권력을 쥔 여당은 늠름한 아들을 차지한 며느리 쪽일테고, 보란듯한 아들 빼앗긴 기분이 드는 건 아무래도 야당쪽일 듯 싶다.
 언론이야 제 편한 쪽으로 부담없는 입을 놀리기 쉬운 탓에 때로는 시누이 노릇을 하거나 혹은 시아비 노릇인 경우도 있다.
 사사건건 눈을 부릅뜬 시어미 입장에서야 며느리 하는 양양이 마음에 들리 없다. 어떻게 일궈 온 집 안 일 것이며 어떻게 키워 온 아들이던가. 며느리 달달 볶는 일이 더러는 감정 탓임을 스스로 잘 알아도 궁극의 목적은 다 집 안 잘되자고 하는 일이다.
 이 나라의 메인스트림을 자처해 오던 야당 당수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충정으로 단식을 한 건 그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다만 요즘의 야당이나 주류 언론이 거품을 물고 갈데까지 가 보자는 식의 대통령 물어뜯기는 언뜻 보아 집 안을 결딴내자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폭압의 세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고고성(呱呱聲)을 내며 정권과 맞서 싸울때 양지녘에서 졸린 하품을 하던 정치인과 언론인이 언제 그런 설도(舌刀)와 필봉(筆鋒)을 가졌나 싶을 정도로 그 각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하루라도 대통령을 씹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기라도 할 것 처럼.
 이 나라 민주 헌정 질서 이후 성공한 대통령은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정치 역시 실패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
 취임 이후 노대통령을 상대로 한 서릿발 같은 추궁은 그 역시 빨리 실패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려 놓고 싶어 안달인 상태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도록 해, 더 큰 욕을 보여야 마땅할 것 같은 분위기이기도 하다.
 그 무시무시한 오기(傲氣)의 광풍 앞에 백성들 역시 실패한 대통령 아래의 실패한 나라에서 실패한 국민으로 살기를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난 후 그 모든 잘못은 노대통령과 그 일당들에게 있었으니 그 시절의 고통은 어쩔 수 없었노라는 변명으로 위안을 삼아야 될테지만.
 안방과 부엌의 차이처럼 잘잘못을 가리는 건 때로 부질없다.
 아들이 연애로 데려 온 며느리든 통혼(通婚)의 엄숙한 절차를 거쳐 시어미 낙점으로 데려 온 며느리든 며느리는 어쨌든 다음 세대의 집 안을 이끌어 갈 또 하나의 기둥이다.
 노여움과 오기보다는 나라를 위한 신명나는 굿 판이 아쉬운 시점이 아닌가.
 갈 수록 뒤처지는 국가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시어미 며느리가 더불어 궁둥 춤을 출 일이다.
 <권혁철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