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반장과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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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01 00:00
  • 수정 2003.08.31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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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혁철 정치부장
 
 8월 말 이면 초등학교 아이들의 2학기가 시작된다.
 그러면 학년마다 학급마다 반장을 새로 뽑는다. 아이들 세상도 어른 세상 못지않게 치열하다. 1학기 시작할 때야 아이들 서로간에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다소 엄벙덤벙 선거를 치르지만 2학기 땐 상황이 다르다.
 초등학교 4학년 딸 아이의 엄마는 반장이 꼭 돼야 한다는 반장 지상주의자다. 그래야 책임감이 생겨 공부도 더 잘하고 리더십을 길러야 이 다음에 남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자기도 초등학교 때 반장 등의 임원을 했기에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것이라며….
 내 생각엔 1년에 한 두번 학교를 가더라도 반장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쉽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장 ‘내 자식은 왜 못하나’ 라는 섭섭함의 발로인 것 같았지만 아내에게 쉽게 그런 지적을 내놨다간 이후의 일이 간단치 않은 법이다.
 하여 반장에 관한 일은 1학기 초 반장 선거 이후부터 간간이 식구들의 화두에 올랐던 터였다.
 “여자니까 반장에 나서기보단 부반장 정도가 어울리지 않겠냐”, “그거 반장되면 엄마가 맨날 학교 가서 이것 저것 뒤치닥거리 대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빠식의 견해를 밝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요즘 아이들 세상 잘 모르는 아빠라는 평가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한번은 술 한잔 걸친 날 농반진반으로 아이에게 “야, 니네 반 애들 한번 다 델구 나와라, 아빠가 자장면 한 그릇 씩 사줄께” 라는 제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내 머리속은 한 반 아이들이 36명이라니까 36×2500원씩 하면 전부 9만원 정도라는 계산이 돌아갔음은 물론이고 우리 아이 미래가 걸린 일인데 그 정도 투자쯤이야 한번 쯤 할만도 하다라는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로부터 들려 올 ”와, 우리 아빠 만세!!!” 정도의 공치사까지도 덤으로 받을 것이라는 음험한 생각을 ‘봤지!’ 라는 으쓱한 미소로 감추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아빠에게 돌아온 건 “내가 알아서 할거니까 아빠는 참견하지마”라는 당돌한 핀잔뿐이었다.
 애들한테 자장면 이면 최고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아빠는 요즘 누가 자장면에 감동 받느냐는 답을 들어야 했고 나아가 그런 식으로 표를 모으겠다는 얄팍한 생각은 금방 들통 나 오히려 친구들에게 완전히 왕따 당한다라는 아이의 상황 인식 때문이었다.
 신문의 규모야 어쨌든 명색이 일간지 정치부장인 아빠는 아이의 선거 참모로서의 역할에 치명적인 오류를 남기면서 한 동안 한심한 아빠가 됐다.
 반장 선거는 임박해왔다. 애써 무심한 척 하던 아빠는 기어이 또 일을 저질렀다.
 “야 임마, 너 이대로 가만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최소한의 표를 모으기 위해선 친구들 불러내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사면서 좀 찍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지 그러냐, 필요하면 아빠가 용돈 줄께.”
 그랬다. 그건 수십년간 길들여져 습관처럼 굳어버린 처절한 유혹의 실체였다.
 선거란 으례 그런 것이라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아빠의 현실적인 현명함을 가장한 바로 그 어둠의 제의.
 제안은 다시 거절됐고 아이는 순전히 제 힘으로, 제 방식으로 반장에 뽑혔다.
 반장에게는 이미 떠드는 애 칠판에 이름 적는 권위주의적 권력은 없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차렷 열중쉬어 차렷 선생님께 경례’를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같은 반 아이들을 대표해 회의를 주재하는 민주적 리더로서의 권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내년 4월로 예정된 17대 총선에는 벌써 돈과 빽, 정치적 타협과 흥정이 춤을 춘다.
 입으로는 정치개혁을 외치면서도 너나없이 음험한 계산을 들이댄다.
 애들 반장선거에서 여지없이 깨졌던 인천일보 정치부장은 오늘도 바로 그 17대 총선의 예비 후보들과 날마다 만나면서 그들의 생각을 탐색한다.

▲ 인천일보, INCHEON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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