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前 언론인
 1950년대, 인천은 흔히 '야도'(野都)라 불렸다. '야도'라니까 지금의 20-30대는 언뜻 조봉암, 장면, 김은하 선생 같은 인천 출신 야당 정치인을 떠올리며 그 같은 인물을 배출한 인천의 정치적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서 말하는 '야도'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야구'(野球)의 도시'를 가리킨다. 그랬다. 인천은 '야구의 도시'였다. '야도 인천'(野都仁川)이었다. 그리고 '야도 인천'은 그 자체로도 우리를 은근히 신명나게 하는 '캐치 플레이즈'였다.
 지금의 50-60대들이 유소년이었던 시절, 의식주는 구차하기가 말할 데 없었다. 6·25전쟁의 뒤끝이라 먹고사는 일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곤궁한 가운데서도 한가지 낙(樂)이 있었다. '그라운동장'(현 도원동 야구장의 별칭)에서 간단없이 펼쳐진 야구 경기 관람이 그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고, 동산고, 인천공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3파전을 벌이다가 1952년 제33회 전국체전에서 인천고가 당당히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인천'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던 무렵이었다.
 인천 야구가 황금 시대의 막을 올린 후, 인천고와 동산고는 청룡기대회, 황금사자기대회, 봉황대기대회 등에서 번갈아 연승하는 기염을 토하며 전국 고교 야구계를 평정해 가자 그 열기는 대단했다. 인천 팀이 출전했다 하면 시중의 화제는 단연 '야구'였다. 어른들은 라디오 주위에 모여 중계방송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고, 학생들은 경인선 열차 편으로 서울로 올라가 원정 응원을 했다. 시가지는 마치 '철시'(撤市)한 듯 하다가 우승 소식과 함께 선수단이 도착하면 일시에 환영회가 벌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애 어른 할 것 없이 동인천역으로 팀을 마중 나가고, 선수단은 브라스 밴드를 앞세워 ’보무도 당당한’ 시가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면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선수단 뒤를 따르며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고,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 속에 선수들에게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었는데 그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것은 축제였다. 축제의 원형(原型)이었다. 시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인천 청소년들의 기백과 투혼을 대견하게 생각했고, 전국을 제패했다는 승리감을 공유하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긍지를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자칭 '야도 인천'이라 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 때 활약했던 분들의 성함과 50년대 후반까지 지속됐던 '전국 4 도시 대항고교야구 경기대회'와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 내인 경기', '인천 사회인야구대회' 등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시민 축제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야도 인천'의 열기가 사라진 것이다. 프로 야구는 재벌들의 상업주의적 계산에 따라 아직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고, 그 여파로 순수한 청소년적 열정과 시민의 열화와 같은 관심 속에서 펼쳐졌던 고교 야구마저 시민의 관심밖에 놓인 현상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프로 야구와 함께 각 지방의 수많은 중·고·사회 야구팀이 열렬한 지원과 관심을 받고 있는 일본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인천일보사가 주관하는 제1회 '미추홀기 전국고교 야구대회'는 인천 야구사의 쾌거라 할만 하다. 이 대회는 '웃터골'에서 '항일 스포츠'로 출발한 인천 야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잇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스포츠 본연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되살렸던 옛 ’4도시 대항 고교 야구대회’의 전신을 잇는 '시민 축제'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축하해 마지않을 일이라는 생각이다. 작년도 일본 갑자원대회의 마지막 날, 나는 우연찮게 일본 동경에 있었다. 그날 일본 신문들은 주최사가 아닌데도 '갑자원 대회' 우승 팀의 면면을 1면 톱과 사회면 기사로 다투어 다루고 있었다. 고교 야구의 국민적 관심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번 제1회 미추홀기 전국고교 야구대회가 인천은 물론 우리 나라 고교 야구의 부활을 이루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 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