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미경 정치2부장
  최근 잇달아 개최된 한-미, 미-일, 한-일 정상회담의 결과를 두고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간 강조해 온 자주 외교 노선을 스스로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특히 일본 방문은 일정을 포함해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가 없지 않았으나, 이 후에는 국제무대에서 한국 외교가 고립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비판이 중앙 언론을 통해 가세하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에 노무현 대통령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수상은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목장 회담’과 ‘유사법제’의 국회 통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외적인 명분과 실리를 톡톡히 챙기는 영리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정치개혁과 국가개혁을 정치적인 신념으로 당내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상의 자리에 오른 두 정치가의 외교 행보는 양국의 현재와 미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도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노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각각 빈농의 부친과 막노동자인 조부를 두었던 서민 출신의 가계를 잇고 있다. 비록 고이즈미 총리의 조부가 체신장관으로 부친은 방위청장관으로 입신하였으나 태생적인 개혁성은 핏줄 속에 녹아있어, 총리이전 25년 이상의 의원 생활에도 불구하고 항상 소수파벌을 대변하는 반골로 활동했다. 지난 96년에는 일본 정치권에서 리버럴 세력을 결집해 신당을 창당하는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록히드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 자민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 카구에이 총리 내각에 대해 ‘내각 타도’의 현수막을 지역구에 내거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있어서도 적극 진출을 모색하던 당내 최대 파벌출신 총리 경쟁자와는 달리 국민적 합의를 주장하는 등 그는 늘 진보적 노선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내각에 들어가 후생성 장관이던 97년에는 한국과 중국의 격렬한 반발을 야기하였던 야스쿠니 신사 참배 9명의 각료 중에서 유일하게 장관 자격의 참배임을 선언한 인물이고, 군소 파벌과 젊은 층의 지원으로 역전승하여 총리에 오른 2001년에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유사법제’ 추진을 개시하는 등 변신을 거듭했다. 이 때의 고이즈미 내각 지지율은 역대 최고인 86.3%.
 일본 중의원 회의에 참석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거두절미한 단답형 지지 발언으로 시종일관해 의원들의 반발을 산 고이즈미 총리는 결국 과거를 잊고 미래로 돌진한다는 예의 일본 정치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비해 노대통령이 자신의 신념을 일순에 바꾸어놓지 않으면서 국제 질서의 현실적인 벽을 함께 뛰어넘고자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마치 모두에 대한 배신인 양 몰아세우는 우리 사회의 극단 논리가 애처로운 것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북핵 해결 방안을 놓고 미국이나 일본 정상과 다른 입장에 있음을 부정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인 국가 이익을 위한 배려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에 보듯이 특정 정권의 출범으로 반짝 이득을 얻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사실에 비추어, 노대통령 개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가 선언한 개혁 정책을 국가의 자산으로 잘 키워갈 경우 그 수혜는 다수의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손미경 기자> mimi@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