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으로 보는 인천경제사-2부(2)휴전후 7년간 제공된 원조물자는 전쟁으로 피폐된 인천항에

제2전성기를 가져다 줬다.

지역기업체에도 크나큰 영향을 줘 경기회복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원조물자가 연고위주로 지원되면서 원자재를 구하지 못한

지역 중소업체들이 도산하게 되고

공장의 잇단 증설로 인한과잉투자로 지역경제는 또한번의

진통을 겪게 된다.

 남북 양측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낳은 6ㆍ25동란이 1953년 휴전되자 인천항에는 우방국들이 보낸 원조물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미군이 주도한 UN연합군이 인천을 상륙작전의 거점으로 선택했고 휴전 이후에는 인천항을 군사전용항구로 사용한 때문이다.

 이후 7년여에 걸쳐 제공된 원조물자는 그 지원목적에 걸맞게, 전후(戰後) 빈곤에 시달리던 시민생활 구제(救災)는 물론 당시 인천경제를 주도했던 항만경기와 산업계를 회생시킨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효과에 못지 않게 다른 한편으론, 오늘날 지역사회가 앓고 있는 서울의존도를 가속화시킨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인천사(史)에 야누스적인 존재로 반영되고 있다.

 인천항은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전국 수입화물의 94%, 수출화물의 81%를 취급하는 국내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그러나 6ㆍ25동란으로 인천항의 기능은 거의 마비상태가 된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는 인천항의 피해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6ㆍ25동란은 인천의 모든 공업시설들을 때려 부수거나 잿더미로 만든 것에 그치지 않았고 항만시설까지 망가뜨려 국제항의 기능을 피폐시키는 등 재기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안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중앙정부가 부산으로 옮겨가자 수출입이 자연스레 부산항에 집중되면서 인천항의 기능은 급격히 위축됐다. 1947년 12억9천8백만달러에 달했던 인천항의 무역고가 1952년에는 4억원으로 3분의 1수준에 불과했고 이로 인해 전국대비 인천항의 무역비중도 1952년 수출 7.6%, 수입 3.7%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밀려 든」 원조물자는 전쟁상흔의 치유와 아울러 인천항에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 줬다. 물자원조 지원 첫해인 1953년 인천항의 무역고가 19억원으로 52년보다 무려 4배 가까이 늘어났고 이후 이용화물은 급증추세였다.

 내역별로도 수입화물이 전체 수출입화물의 80% 이상을 점유했고 화물별로는 당시 주요 원조물자였던 식료품, 음료품, 담배가 수입의 78.5%를 차지했다. 원조물자가 항만경기를 주도했던 것이다.

 경인항운노동조합이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는 『인천항이 미군 진주(進駐)와 함께 뒤따라온 군수물자의 양육(揚陸)운송 즉, 군수하역과 원조물자의 도입으로 있게 된 민수물자 등으로 활기를 찾았으며 부두근로자에게 살포되는 노임만도 월 1억원을 넘어 인천하역업계는 인천경제계에서 큰 존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조물자 지원은 지역소재 기업체에도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당시 삼백(三白)산업으로 불린 소맥류와 면화 관련업계의 경우 특히 경기 회복이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수혜(受惠)가 가장 컸던 분야는 제분업계였다. 외국원조자금에 대한 특혜로 재건된 대한제분은 식량파동에 따른 밀가루 수요증가에 힘입어 휴전 후 3년만에 생산능력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삼화제분이 설립된 1957년 이후에는 이 두 업체를 양대 산맥으로 인천제분업계는 가파른 성장가도를 달렸다.

 고려정미소를 비롯한 정미공장들은 서해의 섬 지방과 충남, 경기 일원에 제공되는 원조곡물 도정으로 가동이 활기를 띠었고 주정 및 양조업계도 원조자금 이용과 외국으로부터의 순조로운 당밀의 도입으로 공장가동률이 급증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미국산 원면이 지원되면서 휴전 이후 적자를 면치 못했던 동양방적과 흥남방직으로 대표되는 지역내 섬유업계도 성장률이 연간 18%에 달했고 대성목재 등 목재업계와 제철업계도 전후 복구사업의 본격화로 왕성한 생산활동을 보였다.

 일제 귀속재산이었던 한국화약과, 국내 화성비료의 50% 정도를 생산하는 조선화학비료 등도 원조자금 지원과 원자재 조달로, 당시 7개 공장이 가동 중이었던 인천의 명물 성냥공장들도 미국산 연초 조달로 생산실적이 해방전 수준에 육박할 정도였다.

 여기에 당시 국내 4대 기간산업 중 하나였던 인천판유리공장이 1957년 설립되면서 인천경제는 전쟁 후유증을 말끔히 씻고 호황을 누리게 된다.

 1954년 현재 인천의 업종별 공장실태를 보면 총 241개 공장 중 운영중인 것이 211개, 운휴(運休)중인 것이 30개로 87.6%의 가동률을 보였다는 것은 미국의 물자원조가 지역경제 회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짐작케 하고 있다.

 그러나 원조물자에 의존해 성장가도를 달리던 지역경제는 5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휴전 후 반짝경기에 한껏 기대를 가졌던 지역토착 중소기업들은 원조물자가 연고 위주로 제공되면서 원자재 조달난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경영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일례로 섬유업계의 경우 1953년 134개에 달했던 가동업체가 원자재를 구하지 못한 중소업체들의 잇단 도산으로 1958년에는 30개로 격감했다.

 또 국내수요를 고려치 않고 원조물자에만 의존한 채 생산공장 설립이 잇따르면서 1958년 이후 과잉투자 공황이 발생해 지역경제는 또 한번 진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어쨌든 50년대 인천경제는 원조경제시대로, 경제성장과 기업의 부침은 인천항에 쌓인 원조물자에 의해 좌우됐다. 그러나 경제재건을 위해 산업계에 투여된 원조물자와 원조자금이 귀속재산 불하와 마찬가지로 미군정과 신정부에 유착해 있던 대기업 등 서울 소재 특권층에 집중됨으로써 토착기업의 몰락과 더불어 지역경제가 서울의존형으로 고착화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은 아쉬움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김홍전기자〉

kj kim@incho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