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인천민예총 정책위원장
 인천시에서 지역대표축제기획안을 공모한다고 한다. 법인, 단체, 이벤트사, 일반시민, 국민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당선작에는 축제 시행시 행사 대행사 또는 실행 위원으로 참여 기회도 준다고 한다. 축제, 좋은 일이다. 요즘 사람들이야 어디 맘놓고 부대끼며 놀아볼 시간이 있는가, 놀아볼 장소가 있는가. 관청에서 놀이판 벌이는 것을 도와준다니 잘하는 일이고 말고. 하지만 의심쩍다. 법인, 단체, 이벤트사 등을 가리지 않고 ‘대표축제안’을 공모하여 나중에 행사 대행을 시킨다니 그 축제는 어떤 모양일까?
 문득 옛 일 하나가 머리에 떠오른다. 1986년 봄이었다. 처음으로 대학 축제를 겪어 보게 된 나는 흥분과 기쁨으로 설레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당시 나의 모교는 학생들과 총학생회 사이가 비정상적이었는데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학생들을 위해 움직여야 할 학생회가 오히려 학교 당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동아리며 과학생회는 축제 참여를 거부하였고 그렇게 해서 빈자리를 총학생회는 거액을 들여 밖에서 불러온 놀이패며 그룹 사운드로 채웠다. 겉보기에는 소란하고 흥청거리는 ‘축제’인 듯 싶었지만 사실 그 ‘축제’는 학생들이 없는 쭉정이 축제요, 남들의 축제였다. 축제의 주인이어야 할 학생들은 졸지에 구경꾼으로 전락하였다. 대학생활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1학년이었지만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축제 속에서 더 건강해지고 씩씩해진 것이 아니라 더 소외되었고 그래서 우울하였다.
 이것은 내 대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 후, 여러 행사를 만드는 데 스스로 참여하여 보았다. 어떤 때는 제법 성공적이어서 날개를 단 것 같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실패로 참담하여 늪 속에 잠기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 경험 속에서 우리들은 노는 법, 싸우는 법, 일을 만들어 보는 법, 원인과 결과를 따져 반성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유명짜한 가수에 미칠 리 없었고 우리가 추는 춤이 인간 문화재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땀흘리고 소리치고 흙먼지 속에 뒹구르며 만든 축제는 구경꾼으로 있을 때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축제의 주인은 ‘축제를 만드는 사람’이다. 2002년 여름의 기쁨과 함성을 되새겨 보라. 누가 시켜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가? 월드컵은 본래 국가의 행사일 뿐이었지만 그것을 ‘축제’로 만든 것은 한마음으로 뒤엉켜 노래하고 춤추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만드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이 다른 축제는 쭉정이 축제요, 가짜 축제이다. 그것은 주인과 객을 나누고 객을 소외시키며 객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천시에 묻고 싶다. 인천시가 기획하는 축제의 주인은 누구인가? 단체, 법인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이벤트사라니 인천시는 지역 축제를 이벤트사에 맡겨 시민을 고객으로 삼을 생각인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축제에는 분명 시민은 없고 장사꾼만 넘쳐날 것이다. 기획안 공모 내용을 보니 점입가경이다. 지역의 정체성 확립과 애향심 고취, 시민적 자긍심과 동질감을 형성 ‘시킬 수 있는’ 내용의 기획안을 모집한다고 한다. 그 정체성, 애향심, 자긍심이며, 동질감이 ‘시키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대표’라는 단어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이다. ‘대표’라는 것은 여러 사람의 중지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 지역의 축제가 그 지역을 대표하기까지는 작은 노력과 참여가 쌓이며 정서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관청에서 대표라 이름짓는 것으로 대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구상으로는 인천시민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축제를 만들어보기는 커녕 축제를 빙자한 장삿속에 시민들의 소외감만 깊어갈 것이 명약관화하다.
 지금이라도 인천시는 무엇이 축제를 이루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 자신의 축제를 위해서는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상상력을 모으는 자리, 함께 하며 노력을 모으는 과정, 함께 어울려 마음껏 놀아보는 판이 필요한 것이다. 인천시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노력들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고 할 것이다.